유제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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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
탐방로그
유홍석 가족묘의 GPS 상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 21-1이지만 넓은 범위를 포괄하므로 춘천시 남면 가정리 349-1을 찾아가는 편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묘소의 GPS상의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이지만 넓은 산 지역을 포괄한다.
대신, 묘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인 349-1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유제원 선생과 윤희순 선생의 묘이다.
유제원 선생은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시다.

윤희순 선생의 묘는 10월 20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고흥류씨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폄되었다. 이후 춘천 의병항쟁의 진원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유제원, 윤희순 선생의 묘는 2012년 4월 6일 고흥유씨(고흥류씨) 가족묘역으로 이전되었다.
'지사 고흥유공 제원지묘
배 유인 해주윤씨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공의 휘는 제원이요 자는 성지요 호는 항제니 고흥인이다. 고는 휘 홍석이니 의병장이요 비는 파평윤씨니 학생 영만의 녀이다. 공이 철종 10년 기미8월 13일에 출생하니 총명이 와인하여 7세에 능히 시를 지어 松柏葉似針楊柳枝如絲十月天氣冷未作良人衣(송백엽사침양유지여사십월천기냉미작양인의)라 하였으며 8세부터 종조 성재 선생과 족조 항와 선생에게 수학하여 화서 중암 두 선생의 대도를 습득하였다. 화동사판의 판자는 모두 공이 쓴 바이다. 조선 말엽에 가존 외당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토적할 때에 공은 부인 윤씨와 함께 극력 주선하여 의병활동을 도왔
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 외당이 가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의암 선생과 함께 국권회복을 도모하다가 외당과 의암이 차제로 하세하여 대의를 펼 수 없게 되자 공은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을묘년 10월 2일에 돌아가니 요동 회인현 대아하에 안장하였다가 경오년에 장자 돈상이 고향인 관천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공의 배는 해주윤씨 휘 희순이니 해양군 양간공 희평의 후학 생익상의 여이다. 철종 11년 경신에 출생하니 천성이 씩씩하고 활발하여 16세에 공에게 시집온 후 집안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조선말에 외당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윤씨는 부녀들을 모아 군자금을 거두고 의병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의병군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경술국치 후 요동으로 들어가 외당의 국권회복운동을 돕다가 외당과 항재가 연하여 돌아가고 또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장남 돈상이 왜병에게 피살되자 3대에 걸친 의병활동에 참여하던 윤씨는 원한에 사무쳐 을해년 8월 1일에 돌아가니 요동 해성현 묘관 둔지산에 안장하였는바 세월과 인사를 헤아리건대 고국으로 반장할 가망이 없으므로 장손 연익이 갑자년 6월에 윤씨의 신위를 옥석에 새기어 공의 좌측에 합폄하였다. 임술년 11월 9일에 강원대학교 이상주 총장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양하였으며 또한 국가에서는 윤씨의 구국활동에 대하여 계해년 8월 31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 바 있다. 공의 선계와 자손에 대하여
는 공 고 외당 선생 묘문에 상기하였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의 비문은 전자에 중와 김용숙 공의 지은 바가 있으나 이제 윤씨의 신위를 합폄하였으므로 양위의 사적을 결합하여 새로 쓰는 바이다.

단기 4317년 6월 일 강원대학교 교수 박한설 근찬
영력 기원 후 육갑자 음력 5월 일 족제 류제생 근서
광복 후 40년 갑자 6월 일 장손 연익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