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
- 탐방로그
- 사우 내부의 중앙 북단에 면암 최익현선생의 위패가 남향하여 모셔져 있다. 배면벽에 길이 2m, 폭 1m의 영정(影幀)이 보존되어 있으며 시대와 작자는 미상(未詳)이나 73세 때 최익현의 관복차림의 전신 좌상을 담았다. 내부 좌측면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최면식(崔勉植)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규모는 가로 54CM 세로 92CM이다. 최면식은 최익현의 손자이면서 근현대 시기의 독립운동가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에 있는 사당 채산사를 찾았다.
채산사(茝山祠)
채산사는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사상을 주창한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항일 독립운동가인 염재(念齋) 최면식(崔勉植, 1891~194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최익현은 철종6년(1855)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동부승지,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공조판서 때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을 정권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광무9년(1905) 일본의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거하고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건너가기 전 부산 앞바다에서 신발에 모래를 채우며 '비록 육신은 일본으로 가지만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 라고 했으며, 유배지에서는 '일본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을 한 끝에 세상을 떠나 그의 나라를 위한 절개를 엿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해 훼철되었던 채산사는 1949년 지역의 유생들이 면암의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다시 지었다.
채산사는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사상을 주창한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항일 독립운동가인 염재(念齋) 최면식(崔勉植, 1891~194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최익현은 철종6년(1855)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동부승지,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공조판서 때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을 정권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광무9년(1905) 일본의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거하고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건너가기 전 부산 앞바다에서 신발에 모래를 채우며 '비록 육신은 일본으로 가지만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 라고 했으며, 유배지에서는 '일본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을 한 끝에 세상을 떠나 그의 나라를 위한 절개를 엿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해 훼철되었던 채산사는 1949년 지역의 유생들이 면암의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다시 지었다.
茝山祠(채산사)
茝山祠(채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