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달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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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내동 산1-1
탐방로그
배영직의 묘소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모셔져 있으며, 본 사적은 달성 배씨의 종묘에서 배영직, 배영달, 배영술의 공적비을 한 곳에 모아둔 것이다. 세 분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시지만 서훈은 배영직 선생 한 분만 받으셨다. 배영달 선생과 배영술 선생은 1919년 4월 3일 논산읍 취암리 모정산에서 약 4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배영직 선생은 4월 1일 두마면 두계시장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출처(http://www.grandculture.net/nonsan/toc/GC0200116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남 논산시 내동 산 1-1 (15 위쪽) 배씨천 종산 묘소 앞 독립지사 배영술, 배영달 공적비 및 애국지사 배영직 공적비를 찾았다.
3분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있었다.
獨立志事 達成裵公 榮達 功績碑(독립지사 달성배공 영달 공적비)
獨立志士 達城 裵公 榮達은 集賢殿 直提學 乙甫 先生 十四代孫 存植의 獨子로 一八八一年 論山面 鷲岩里에서 태어 나셨다. 晝耕夜讀하며 成長함에도 쉬이 漢學에 能通하여 일찍이 젊은 訓長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셨다. 性稟이 곧바른 松竹이라 一九一0年 日帝의 强奪로 韓日合邦이 되자 붓을 꺾고 庚戌恥辱 衝擊과 憤怒를 삭이지 못해 論山 地域 少壯 儒林들을 찾아다니시며 “歎息만 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도 힘을 합쳐 日帝에 抗拒하여 主權 찾는데 一助 하자”고 呼訴함이 吐血과 같았다. 及其也 日警에 쫓기는 몸이 되어 數年間 放浪生活을 하시다가 一九一九年 己未 三.一萬歲運動 이 全國 各地로 터진 봇물처럼 波及될 때 主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隣近 장날 不時 太極旗를 흔들며 萬歲示威를 數次 主導하셨다. 특히 彩雲 李根奭 可也谷 陳學奉 等과 事前 謀議 同日同夜 大規模 햇불 萬歲示威를 擧事키로 하고 公은 三月 十八日밤 同調 壯丁 四十餘名을 모아 論山面 鷲岩里 대하골 뒤 茅亭山에서
짚단에 불을 지피고 信號하며 일제히 大韓獨立萬歲를 絶叫했다. 미쳐 山에 오르지 못한 수랑골 대하골 먹골 住民들은 집 마당에서 골목에서 萬歲소리 드높이
니 彩雲 玉女峯에서 可也谷 金城山에서 魯城山에서 同時에 불이 오르고 萬歲喊聲은 놀묏벌이 떠나갈 듯 地殼變動의 震動을 쳤다. 결국 榮達公은 主動者로 日警에 逮捕되어 酷毒한 獄苦를 치르게 된다. 갖은 拷問과 懷柔에도 同志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自己 單獨行動이었다고 强辯하시다 笞杖九十度의 酷刑을 當하셨다. 피투성이에 살점은 떨어지고 짖이겨져 公이 死境에 이르니 들것으로 떼어메다가 후미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기며 뒹굴며 城東面 三山里 疎宗宅으로 避身 二年餘 隱居하시다 鷲岩里 故鄕에 오시니 日警은 晝夜 監視 警戒로 親姻戚과 住民의 接近을 막았다. 病看도 못하여 그 때에도 笞杖의 傷痕等이 아물지 않고 구더기가 들끓는 蠅蛆病으로 數年間 또 苦痛의 連續이셨다. 田畓을 팔아 獨立運動資金으로 全 家産을 蕩盡하여 제대로 成長시킬 수 없던 膝下의 四兄弟마저 風散되고 日帝의 强占期 鬱憤에 病이 깊은 몸을 草根木皮로 근근히 延命하셨다. 多幸히도 그토록 오랜 歲月 애타게 渴望하던 祖國光復을 보시고 壬辰年 二月 二十一日 壽 七十一歲로 永眠 하시니 鄕人들은 公을 茅亭志士라 稱하여 欽仰하더라. 이와 같은 事實은 韓國獨立運動史 獨立有功者功勳錄 論山地域三.一運動史 等의 歷史的 文獻에서 빛나고 있다. 그 값진 빛 公의 愛國忠節을 永世에 기리기 위하여 裵門의 諸孫과 市民의 뜻을 모아 公의 獨立運動行狀을 추려 이 碑에 새겨 다듬고 그 功績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
西紀 一九九九年 己卯 五月 日 推進委員長 論山市長 田鎰珣 謹竪 松原 裵尙煥 謹撰 靑竹 林憲善 謹書
達城裵氏直提學公派門中 協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