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구 충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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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419-7
탐방로그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419-7 세도종합복지회관 앞에 위치한 조중구 선생 충훈비를 찾았다. 조중구 선생 충훈비 바로 옆에는 3.1독립운동기념비도 함께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위원과 외무위원에 4년여를 재임하신 후 이어서 중화민국의 군문에 투신하여 협서 육군1사단 사령부의 고등고문관과 건국군 상군 제6사령부의 군의처장 겸 제3사령부의 등의(登議)와 4성 연합군 총사령부의 등군(登軍)직 등을 역임하는 동안 풍찬노숙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와신상담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항일투쟁에 분골쇄신하시었다. 이와같이 오상불망하시던 조국광복을 미성하니 日暮途遠(일모도원)이라 憂悶(우민) 得病(득병)하시어 서기 1942년 7월 26일 이역만리 중국 성도에서 천추의 유한을 품고 향년 63세를 일기로 노훈의 보람없이 천애의 고혼이 되시었으니 장엄하고 위대한 장부의 일생이었다.
서기 1945년 8.15광복 이후 정부에서 수차에 걸쳐 독립지사에 대한 공훈이 시행되었으나 선생께서 하세하신 후 잇따른 동지들의 별세와 후생들의 무지불민으로 인하여 당당히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는 위훈이 민몰(泯沒)지경에 이르자 서기 1977년에 이르러 이창규씨의 주선으로 비로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작년 8월에 겨우 衣履(의리)로 代葬(대장)하고 묘정비를 건립하게 이르렀다. 묘비제막 당일 원근 명처에서 참집(參集)한 5백여 인사들의 구송(口頌)이 선생의 평생을 국가민족에 바치신 공훈은 묘비에만 그칠 것이 아니요. 거군적으로 위훈을 길이 현창하자는 공론이 준발(峻發)하매 강호장보(江湖章甫)들의 흔연(欣然)한 호응으로 발의한 지 불가 1년 여에 이 충훈비를 세움에 즈음하여 본 사업추진위원장 유인혁씨로부터 선생의 공적
실기를 나에게 위촉하는 바 회고컨대 선생과 나와는 일찌기 상해임정과 중국군 참여시에 유일무이하게 동고동락 하였을 뿐 不啻(불시)라 특하 선생의 충의단성은 세인의 귀감이셨으니 이제 재삼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고사할 수 없어 右(우)와 如(여)히 약기하여 선생의 훈적을 길이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67년 을축 9월 일
대한민국 광복회장 강릉인 유석현 근찬
임천향교 전교 문화인 유인혁 근서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419-7 세도종합복지회관 앞
대한독립투사 비아 조중구 충훈비를 찾았다.
대한독립투사 조중구(趙重九) 선생 공적기
선생은 서기 1880년에 부여군 세도면 강산리 장현에서 출생하시니 호는 비아(非我)요 풍양조씨(豐壤趙氏)이시다. 어려서부터 기품이 준엄하고 기개가 걸륜하시었스며 서기 1909년에 향리 장현에 천흥학교(天興學校)를 창립하고 스스로 학감이 되어 민족의 자주력을 교육시키며 국내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해외 망명지사들과 접선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셨다. 서기 1914년 왜경에 피검되어 인천감옥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르시고 출감하셨으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활동을 할 수가 없자 서기 1912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셨다. 이로부터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 선생 등을 위주로 하여 강명규 차이석 윤기섭 도인권 조상섭 등 동지들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시어 초대위원과 외무위원에 4년여를 재임하신 후 중국의 군문에 투신하여 협서육군 제1사단 사령부의 고등문관과 건국군 상군 제6사령의 군의처장(軍醫處長) 겸 제3사령부의 등의(登議)와 4성 연합총사령부의 등군(登軍) 등을 역임하시며 오직 항일투쟁에 분골쇄신하시었다. 서기 1942년 조국의 광복을 눈앞에 두고 망국의 한을 품으신 채 이역만리 중국 성도에서 일생을 마치시니 향년 63세이시며 서기 1977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建國褒章)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國章)이 각각 추서되었다.
1996년 11월 향토회 작목반 일동
대한독립투사 비아 조선생 중구 충훈비
우리 배달민족 오천년사에서 가장 큰 치욕은 실로 경술국치라 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국내외에서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이 봉기되니 독립투쟁에 대한 왜적의 강압이 날로 尤甚(우심)하여 짐은 필연적 추세이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국내에서는 투옥 학살되고 또는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니 이즈음 백제 고도 부여군 세도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고자 일생을 홍모와 같이 버리신 분이 계시니 이는 곧 비아 조선생 중구이시다.
선생은 서기 1880년 정월 14일 충남 부여군 세도면 자산리 장현에서 출생하시니 자는 雲雷(운뢰)요 非我(비아)는 자호이시며 관적은 풍양이시다.
유시로부터 기품이 준엄하고 기개는 회천동지하시었으니 쇠잔하여가는 국운을 어찌 좌시할 수있으리요. 바로 경술국치 1년 전인 서기 1909년 선생의 나이 30세 되시던 해 결연히 궐기하여 국운의 광복은 대중계몽을 하여 인재양성이 첩경이라 확신하고 장현에 천흥학교를 창립하고 스스로 학감이 되어 수년간 교육사업에 晝宵(주소) 심혈을 경주하는 한편 국내 동지를 규합하고 일방으로는 해외 망명 지사들과 접선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시니 왜적의 탄압은 불가피라
때는 서기 1914년 드디어 피검되어 인천감옥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루시고 익년에 출감은 하셨으나 감시와 탄압은 일익가중하니 본인은 물론이요 지어 삼족 친지에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셨으므로 국내활동은 도저히 불능하게 되어 서기 1917년 부득이 懸崖(현애) 철수의 용단으로 고국 산하를 등지고 중국 상해로 망명에 오르셨다.
이로부터 선생은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 선생 등을 위주로 하여 강명규 차리석 윤기섭 도인권 조상섭 등 동지들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시어 서기 1919년 4월에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