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1012-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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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건립된 졸와 곽종의 지사의 항일투쟁실록비이고 옆에는 2021년에 새로 세워진 항일투쟁 추기비가 있다. 곁에는 아드님 되시는 해파 곽태진 현창비도 있다.
한편 디지털고령문화대전을 포함한 인터넷 사이트에 위치 정보가 잘못 안내되어 있어 바로잡는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870이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해당 주소로 찾아가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곽씨 집안의 독립유공자 비석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밖에 있다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바른 주소는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1012-1이다. 인터넷에서는 틀린 정보도 빠르게 복사가 되다보니 바로잡는 것이 시급해보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진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지사를 부자 공모 항일운동자라 하여 고령경찰서에 연행하여 수십일 동안 감시 중 서기 1945년 8월 15일 애타게 기다리던 조국해방이 되자 석방되어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이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9년 월 일
성산후인 이종환 근찬
성균관 전의 현해봉 근서
비건립추진위원회 근수
서기 1989년 월 일
성산후인 이종환 근찬
성균관 전의 현해봉 근서
비건립추진위원회 근수
拙窩 郭鍾義 先生 鬪爭實錄 追記碑(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록 추기비)
拙窩 郭鍾義 先生 鬪爭實錄 追記碑(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록 추기비)
졸와공의 자는 성강이다. 호의단 사건에 부자 공모라 하여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중 고천이란 서장이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묻기를 현재 미국과 일본이 전쟁중인데 선생은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소라는 물음에 어느 나라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소라는 대답에 서장이라는 자가 대노하여 석방 에정은 취소하고 종전후 8월 15일에야 석방되섰다.
문예원 원장 여산 송지영 근찬
향교전 전교 동래 정순권 근서
단기 4324년 신미 2월 일 립
졸와공의 자는 성강이다. 호의단 사건에 부자 공모라 하여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중 고천이란 서장이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묻기를 현재 미국과 일본이 전쟁중인데 선생은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소라는 물음에 어느 나라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소라는 대답에 서장이라는 자가 대노하여 석방 에정은 취소하고 종전후 8월 15일에야 석방되섰다.
문예원 원장 여산 송지영 근찬
향교전 전교 동래 정순권 근서
단기 4324년 신미 2월 일 립
비문에 의하면 곽종의 선생은 곽태진 선생의 부친이 되신다. 그리고 곽종의 선생은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拙窩 郭鍾義 志士 抗日鬪爭實錄碑(졸와 곽종의 지사 항일투쟁실록비)
拙窩 郭鍾義 志士 抗日鬪爭實錄碑(졸와 곽종의 지사 항일투쟁실록비)
拙窩 郭鍾義 志士 抗日鬪爭實錄碑(졸와 곽종의 지사 항일투쟁실록비)
지사는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시 의병장이신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서기 1879년 3월 10일에 출생하였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서기 1960년 2월 7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지사는 국운이 쇠락하여 조선 반도 삼천리 강토와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 조국광복이 있을때까지 36년간 압박과 수탈에 대항하여 이 고장에서 항일투쟁으로 민족정기를 드높였다. 지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 년간에 대정을 가살이라는 항문의 풍문이 있다고 발설한 것이 말성이 되여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
은 바 있다. 지사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애국자로서 항상 울분을 토로하였다. 지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포부와 경륜이 있는데도 청장기를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강압을 받으면서 불우한 한 평생을 지냈다. 자유스럽게 경작해 오던 담배를 총독부가 경제적 수탈 방법으로 전매법을 시행하여 담배 생산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배대를 즉석에서 꺽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 또 전매청 직원이 담배와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합동 수색반이 동리에 와서 집집마다 뒤지면서 하물며 내실까지 신발을 신은 채 뒤지자 이에 동리청년들이 격분하여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동리청년 수십명이 지사와 함께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일부는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어 기후 소위 공무집행 방해라는 죄명으로 6개월 징역형을 받은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바 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불법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독려차 나와서 연장자에게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데 격분하여 그 조카 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에 고령경찰서는 답곡동을 포위하여 졸와 곽종의 지사와 자 태진을 비롯한 곽시 일문 노소 수십명을 항일가문이라 하여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그 당시 또 한편으로 부재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부재지주의 횡포에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항시 3.1운동 날이나 큰 사건이 생길 때마다 요시찰인 또는 불령선인으로 지목하여 예비검속하는 것이 일수였다. 자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