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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 산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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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 산165에 위치한 김교영 선생 묘소를 찾았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독립유공자 김교영선생 묘소 안내판이 있었다. 묘소 안내판 상에 소재지가 하남시로 되어있다. 하남시에서 건립되었던 것이 이장 과정에서 함께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유공자 김교영 묘소.
소재지가 하남시로 되어있다. 하남시에서 건립되었던 것이 이장 과정에서 함께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소재지가 하남시로 되어있다. 하남시에서 건립되었던 것이 이장 과정에서 함께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독립유공자 김교영 묘소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280-4
이 곳은 조선후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김성좌(金聲佐)의 후손들이 묻힌 가족묘지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총 56기의 묘가 있다. 모두가 천주교 신자로서 김우집(金禹集) 김만집(金萬集) 형제가 기해박해(己亥迫害)때 순교하였고, 김문집(金文集)과 그 후손들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주교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인 우집은 구산성지(龜山聖地)내에 묘가 있다. 이 가족묘지는 2002년 천주교 양식으로 묘역과 묘비를 새로 단정하였다. 이 곳에 잠들어 있는 김교영(金敎永 : 1857~1923)은 1857년(철종) 구산(龜山)에서 출생하였고 세례명은 요셉이다. 부인은 해주오씨이며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김교영은 1919년 3월 27일 당시 62세로 동부면사무소(현재 하남시 천현동 429-4/6번지)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다음날에도 수백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진두지휘하여 서울로 이동하던 중 동부면 풍산리(속칭 풍산고개)부근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출소한 후 병마에 시달리다가 1923년 타계하였다.
김교영은 1994년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받았다. 묘지 앞에 있는 공적비를 2004년에 건립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280-4
이 곳은 조선후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김성좌(金聲佐)의 후손들이 묻힌 가족묘지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총 56기의 묘가 있다. 모두가 천주교 신자로서 김우집(金禹集) 김만집(金萬集) 형제가 기해박해(己亥迫害)때 순교하였고, 김문집(金文集)과 그 후손들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주교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인 우집은 구산성지(龜山聖地)내에 묘가 있다. 이 가족묘지는 2002년 천주교 양식으로 묘역과 묘비를 새로 단정하였다. 이 곳에 잠들어 있는 김교영(金敎永 : 1857~1923)은 1857년(철종) 구산(龜山)에서 출생하였고 세례명은 요셉이다. 부인은 해주오씨이며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김교영은 1919년 3월 27일 당시 62세로 동부면사무소(현재 하남시 천현동 429-4/6번지)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다음날에도 수백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진두지휘하여 서울로 이동하던 중 동부면 풍산리(속칭 풍산고개)부근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출소한 후 병마에 시달리다가 1923년 타계하였다.
김교영은 1994년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받았다. 묘지 앞에 있는 공적비를 2004년에 건립되었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자 묘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쪽 묘역 제일 가장자리에 큰 비석이 보였다.
경주김공 교영 요셉, 해주오씨 말이아 지묘
부 서기 1857년 음 3월 15일 생, 서기 1923년 음 4월 15일 졸, 66세
독립유공자 김교영선생 공적비
독립유공자 김교영선생 공적비
공은 조선조 철종8년(서기 1857년)에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 구산에서 휘 元熙(원희)공과 청주한씨의 장남으로 나시었다. 공의 본관은 경주이며 계림군파의 시조이신 휘 稛(균)의 18세손이시다. 이곳 구산에는 공의 6대조이신 통덕랑 휘 聲佐(성좌)께서 한양에서부터 입향하신이래 누대에 걸쳐 경주김씨 일문이 세거해온 곳이다. 공의 집안은 조부때부터 독실하게 천주교를 믿어온 가문이다. 공의 조부이신 휘 萬集(만집, 아우구스띠노)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아우인 휘 文集(문집,베드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공의 큰 조부 되시는 휘 遇集(우집, 안또니오)도 아우들의 뒤를 이어 곧 체포되어 순교하셨으니, 이가 곧 한국천주교 103위 성인중 한분이시다. 그후 대원군 집정기인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공의 집안에 큰 화란이 미치어 숙부 휘 次熙(차희) 당숙 휘 聖熙(성희), 敬熙(경희)께서 순교 하셨
공은 조선조 철종8년(서기 1857년)에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 구산에서 휘 元熙(원희)공과 청주한씨의 장남으로 나시었다. 공의 본관은 경주이며 계림군파의 시조이신 휘 稛(균)의 18세손이시다. 이곳 구산에는 공의 6대조이신 통덕랑 휘 聲佐(성좌)께서 한양에서부터 입향하신이래 누대에 걸쳐 경주김씨 일문이 세거해온 곳이다. 공의 집안은 조부때부터 독실하게 천주교를 믿어온 가문이다. 공의 조부이신 휘 萬集(만집, 아우구스띠노)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아우인 휘 文集(문집,베드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공의 큰 조부 되시는 휘 遇集(우집, 안또니오)도 아우들의 뒤를 이어 곧 체포되어 순교하셨으니, 이가 곧 한국천주교 103위 성인중 한분이시다. 그후 대원군 집정기인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공의 집안에 큰 화란이 미치어 숙부 휘 次熙(차희) 당숙 휘 聖熙(성희), 敬熙(경희)꼐서 순교 하셨
다. 공은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으셨고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시었다. 병인박해 때에는 집안에 미치는 화란을 피해 9세 소년이었던 공은 부친을 따라 일시 강원도 간성에 은둔하였다가 평란이후 구산으로 회향하셨다. 공은 천품이 강직해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였으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공은 늘상 시국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1919년에 드디어 우리 민족의 도도한 역량이 일시에 분출되어 침략자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니, 기미만세운동이 그것이다. 이때 공은 62세로 삼천리 전토로 울려퍼지던 독립만세 소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광주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시었다. 3월 26일 구장일을 맏고 계시던 공은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뒤의 구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며 목청껏 독립만세를 불렀다. 익일에도 공은 수백명의 시위대를 선도하여 천현리에 있던 동부면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 함성에 놀란 면장과 서기들은 항급히 도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의 시위에는 공의 장남 정해, 차남 정숙, 삼남 정수, 오남 정필을 비롯하며 당질 정운, 질서 권명규등 여러 혈족이 동참하였다. 다급해진 일제헌병은 맨손의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공은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디가 결국 일제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공은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하셨다. 몸을 거꾸러 매단채 물을 먹이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끼우고 비트는 등 야만적인 방법으로 공에게 갖은 신체적 고통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공은 광주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29일 경성법원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룬끝에 만기 출소하시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3년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3년 음력 4월 25일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공이 가신지 71년뒤인 1994년에 공은 독립운동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결국 공은 광주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29일 경성법원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룬끝에 만기 출소하시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3년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3년 음력 4월 25일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공이 가신지 71년뒤인 1994년에 공은 독립운동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다. 공은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으셨고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시었다. 병인박해 때에는 집안에 미치는 화란을 피해 9세 소년이었던 공은 부친을 따라 일시 강원도 간성에 은둔하였다가 평란이후 구산으로 회향하셨다. 공은 천품이 강직해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였으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공은 늘상 시국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1919년에 드디어 우리 민족의 도도한 역량이 일시에 분출되어 침략자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니, 기미만세운동이 그것이다. 이때 공은 62세로 삼천리 전토로 울려퍼지던 독립만세 소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광주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시었다. 3월 26일 구장일을 맏고 계시던 공은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뒤의 구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며 목청껏 독립만세를 불렀다. 익일에도 공은 수백명의 시위대를 선도하여 천현리에 있던 동부면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 함성에 놀란 면장과 서기들은 항급히 도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의 시위에는 공의 장남 정해, 차남 정숙, 삼남 정수, 오남 정필을 비롯하며 당질 정운, 질서 권명규등 여러 혈족이 동참하였다. 다급해진 일제헌병은 맨손의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공은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디가 결국 일제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공은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하셨다. 몸을 거꾸러 매단채 물을 먹이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끼우고 비트는 등 야만적인 방법으로 공에게 갖은 신체적 고통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공은 광주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29일 경성법원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룬끝에 만기 출소하시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3년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3년 음력 4월 25일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공이 가신지 71년뒤인 1994년에 공은 독립운동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결국 공은 광주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29일 경성법원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룬끝에 만기 출소하시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3년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3년 음력 4월 25일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공이 가신지 71년뒤인 1994년에 공은 독립운동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을 추서받으셨다. 공은 해주오씨와의 사이에 정해, 정숙, 정수, 정하, 정필의 다섯 아들을 두셨으며, 그 아래에 여러 친손을 보셨다. ...중략.. 선생의 직계후손만도 아홉이요, 다시 그 아래에 자손이 심히 번창하였으니 공이 끼치신 음덕의 소산이라 아니할수없다. 근래에 하남시의 근현대역사를 정리한 일이 연고가 되어 이에 둔필이 공의 공적을 삼가 찬하는 바이다.
2004년 2월 독립기념관 연구원 문학박사 박민영 근찬
서기 2004년 3월 립 후손일동
2004년 2월 독립기념관 연구원 문학박사 박민영 근찬
서기 2004년 3월 립 후손일동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 산165 올라가는 길 입구
묘소 안내판, 공적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묘소 안내판, 공적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독립유공자 김교영선생 묘소 안내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