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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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은 일찍 고종 7년 서기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고을 동쪽 10리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나니 경주 이씨 가문 고려 말엽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 선생의 23대 손으로 부친은 행우공 모친은 벽진이씨 7세에 동부승지 용우공에게 입양하여 서울로 왔으나 13세에 양부가 별세하고 18세에 생부 또한 여의어 소년의 몸에 무거운 상복을 잇달아 입었건마는 꾸준한 노력과 수양으로 자기 앞 길을 개척해 갔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놀랄만한 진경을 보여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게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이오.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 고등수학 법학 의학 등에까지 두루 통달하여 학계의 최고봉이 되었으며 고종의 정치고문 헐버트 박사와 친교를 맺아 외국의 신간 서적을 섭렵하여 구미 정치사조에도 밝았던 한편 관계로 나가서는 탁지부 재무관으로부터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홍문관 시독 시강원 부담사를 지나 궁내부 특진관 외부 교섭국장 학부 법부 협판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른 것은 을사년 36세 때이었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 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종로에서 연설하고 통곡하고 5적을 베어 국민들에게 사하소서 하고 불튀는 상소문을 위헤 올림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4월 18일 서울을 벗어나 북간도로 망명하여 거기에 서전의숙을 세우고 동포 자제들을 교육하더니 다시 다음해 서기 1907년 봄 블라드보스토크로 가서 본국으로부터 아우 상익이 인도해 온 이준과 만나 베드로그라드로 전공사 이범진을 찾아가 상의하고 선생은 정사 이준은 부사로 황제의 밀사 자격을 띠고서 통역하는 책임을 진 이범진의 아들 위종과 함께 3인 동행으로 극비밀리에 홀랜드의 수도 헤그에 그것은 6월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적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보장 받으려 함이었으나 마침내 밀사들의 피듣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또 기자협회 모임에서 연설한 것도 필경 보람없이 된 위에 7월 14일 이준 동지가 통곡하다 못해 피를 토하고 순국하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선생은 그 길로 불국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며 호소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불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우 인석과 함께 고종 황제를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하던 중 마침내 1910년 8월에 국치를 당하자 권업회를 설립하여 산업진흥에 애쓰고 하바로브스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기도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그 계획마저 꿈같이 사라져 가슴에 사무쳐 오르는 통분으로 침식을 잊고 지친 끝에 병은 몸을 니코리스크로 옮겨 신음하다가 이동녕 등 동지들에게 상해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과 그 유물은 모두 불태우고 유해는 가루내어 시베리아에 흩뿌리고 광복하기까지는 제사도 하지 말 것 등을 유언하고서 서기 1917년 정사년 음력 2월 초 9일 바람 찬 만리 이역에서 눈 못 감은 천추의 원혼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된 오늘이외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소서 돌아와 우리의 위로 웃고 받으옵소서.
1971년 3월 1일
이은상 짓고 이범석 비명 이상복 비문 쓰고 보재 이상설 선생 유적 보존 위원회 세우다
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
溥齋 李相卨 先生 崇慕碑(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
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
지난 날 한국 말엽의 비통한 역사 위에 덮쳐 오는 노도탁랑을 무릅쓰고 산같이 우뚝 섰던 정기의 인물 한 분 그가 바로 저 유명한 헤그 밀사 세 어른 가운데서도 정사의 사명을 띠고 가셨던 보재 이상설 선생이시다. 나라가 기울어 나라를 울고 집을 버려 집을 울고 제 몸 또한 울어 세 울음의 슬픈 시를 읊었던 선생을 위해 나는 이제 선생의 풀지 못한 천추회한을 다시 울어 그 눈물로 먹을 갈고 그 먹을 찍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니 어찌도 연명이 깨끗한 국화 이슬로 먹을 갈아 그 먹으로 조국 진나라 역사를 쓰던 심경에만 비길 것이랴. 슬프다. 옛부터 모든 영웅 의사들이 비록 나가서 죽는데도 죽어서는 그 몸이 제 고장으로 돌아온다 하건마는 선생은 죽어서도 못 돌아왔고 한 조각 유물조차 끼치지 않아 우리는 다만 아득한 하늘만 바라볼 따름이로되 두세 만인의 선생을 그리고 우르는 뜻이 결코 형상이나 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오. 정신과 사상에 있을뿐더러 그 위에 선생의 48년간의 생애가 바로 민족정기사의 일절이라 그의 행적을 아는 것이 더 귀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 고종 7년 서기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고을 동쪽 10리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나니 경주 이씨 가문 고려 말엽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 선생의 23대 손으로 부친은 행우공 모친은 벽진이씨 7세에 동부승지 용우공에게 입양하여 서울로 왔으나 13세에 양부가 별세하고 18세에 생부 또한 여의어 소년의 몸에 무거운 상복을 잇달아 입었건마는 꾸준한 노력과 수양으로 자기 앞 길을 개척해 갔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놀랄만한 진경을 보여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게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이오.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 고등수학 법학 의학 등에까지 두루 통달하여 학계의 최고봉이 되었으며 고종의 정치고문 헐버트 박사와 친교를 맺아 외국의 신간 서적을 섭렵하여 구미 정치사조에도 밝았던 한편 관계로 나가서는 탁지부 재무관으로부터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홍문관 시독 시강원 부담사를 지나 궁내부 특진관 외부 교섭국장 학부 법부 협판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른 것은 을사년 36세 때이었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 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종로에서 연설하고 통곡하고 5적을 베어 국민들에게 사하소서 하고 불튀는 상소문을 위헤 올림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4월 18일 서울을 벗어나 북간도로 망명하여 거기에 서전의숙을 세우고 동포 자제들을 교육하더니 다시 다음해 서기 1907년 봄 블라드보스토크로 가서 본국으로부터 아우 상익이 인도해 온 이준과 만나 베드로그라드로 전공사 이범진을 찾아가 상의하고 선생은 정사 이준은 부사로 황제의 밀사 자격을 띠고서 통역하는 책임을 진 이범진의 아들 위종과 함께 3인 동행으로 극비밀리에 홀랜드의 수도 헤그에 그것은 6월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적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보장 받으려 함이었으나 마침내 밀사들의 피듣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또 기자협회 모임에서 연설한 것도 필경 보람없이 된 위에 7월 14일 이준 동지가 통곡하다 못해 피를 토하고 순국하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