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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 산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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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 산 102 애국지사 김영조의 묘를 찾았다. 김영일(金永一) 선생은 김영조(金永祚)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 묘비에서는 김영조라는 이명으로 비문이 적혀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항상 착한 마음으로 살고 남을 해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며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공이 피체되어 징역살이를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어린 아들을 업고 가끔 상경하여 위로하였고 정안수 떠놓고 남편이 무사귀환하도록 빌기를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경인년 동란 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나온 김병현의 모친이 3일을 굶어 기진맥진하여 집에 도착했다. 당시 전란 중이라 가족 친지 25 식구가 한 집에서 거친 맥반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이 여인은 기아상태에서 허기를 면하려고 냉수에 간장을 넣어달라고 했는데 이 딱한 처지를 알고 친절히 맞아 한 식구처럼 밥을 대접하여 기력을 회복하였다. 이 여인은 감동하여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장자 운암이 국민병으로 가서 간질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에 이 여인을 만나게 되어 탕약을 가져오는 등 정성스런 도움을 받아 생환이 가능했던 것이니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또한 내외간에도 금슬이 좋아 자녀에게 모범이 되고 세인의 귀감이 되었으니 이 어찌 현부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경자 정월 26일에 출생하여 계해 3월 21일 졸하니 수는 84이다. 묘는 정배리 남방 중미산하 101번지 미좌원에 합폄하였다. 장남에 인수 차남에 명수를 두었다. 손에 용민 용갑과 이건호 홍종표의 처는 인수의 소생이고 용생 용걸과 이희준 이종원 강성수의 처는 명수의 소생이다. 충효는 국가와 민족의 근본논리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처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공의 효행과 성현을 존모하는 자세화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생사를 계교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 등은 후세가 본받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의 장남 운암장이 불녕에게 이르기를 내가 팔순이 넘었는데 죽기 전에 선고의 묘비를 세워드려야 하겠네. 선고의 포창을 자네가 이루었으니 비문도 자네가 써주게라고 하였다. 간절한 부탁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평소에 공을 알현하고 존경해온 바 불문하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운문화를 참고하여 짓고 명한다.
하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항상 착한 마음으로 살고 남을 해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며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공이 피체되어 징역살이를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어린 아들을 업고 가끔 상경하여 위로하였고 정안수 떠놓고 남편이 무사귀환하도록 빌기를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경인년 동란 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나온 김병현의 모친이 3일을 굶어 기진맥진하여 집에 도착했다. 당시 전란 중이라 가족 친지 25 식구가 한 집에서 거친 맥반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이 여인은 기아상태에서 허기를 면하려고 냉수에 간장을 넣어달라고 했는데 이 딱한 처지를 알고 친절히 맞아 한 식구처럼 밥을 대접하여 기력을 회복하였다. 이 여인은 감동하여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장자 운암이 국민병으로 가서 간질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에 이 여인을 만나게 되어 탕약을 가져오는 등 정성스런 도움을 받아 생환이 가능했던 것이니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또한 내외간에도 금슬이 좋아 자녀에게 모범이 되고 세인의 귀감이 되었으니 이 어찌 현부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경자 정월 26일에 출생하여 계해 3월 21일 졸하니 수는 84이다. 묘는 정배리 남방 중미산하 101번지 미좌원에 합폄하였다. 장남에 인수 차남에 명수를 두었다. 손에 용민 용갑과 이건호 홍종표의 처는 인수의 소생이고 용생 용걸과 이희준 이종원 강성수의 처는 명수의 소생이다. 충효는 국가와 민족의 근본논리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처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공의 효행과 성현을 존모하는 자세화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생사를 계교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 등은 후세가 본받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의 장남 운암장이 불녕에게 이르기를 내가 팔순이 넘었는데 죽기 전에 선고의 묘비를 세워드려야 하겠네. 선고의 포창을 자네가 이루었으니 비문도 자네가 써주게라고 하였다. 간절한 부탁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평소에 공을 알현하고 존경해온 바 불문하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운문화를 참고하여 짓고 명한다.
공안공 청백절조 몸 받아 계승하고 가마봉 정기 받아 인품이 준수하네. 산 높고 물이 맑아 인걸이 여기 나니 마음은 백일 같고 거동은 태산일세. 효도와 공경으로 자손을 훈계하고 성현의 도를 좇아 근본을 삼았도다. 모부인 와병에는 간병이 지극하니 군자가 이 아니며 효자가 이 아닌가. 강직한 성품이요. 호걸의 기상으로 스승께 배운 것은 위척의 정신이라. 경술년 국치 후에 칠실 근심터니 기미년 만세운동 정배리 선봉이네. 그날 공훈을 성패로 논할손가. 국가의 포창이야 당연한 일이로다. 오늘의 애국정신 어디서 찾아보나. 민석에 깊이 새겨 만대에 보이노라.
대한민국 광복 후 첫째 임오년 3월 일
경원전문대학교수 장삼현 짓고 불초자 인수 명수 삼가 세우다
대한민국 광복 후 첫째 임오년 3월 일
경원전문대학교수 장삼현 짓고 불초자 인수 명수 삼가 세우다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 산 102 애국지사 김영일(김영조)의 묘를 찾았다.
위성지도로는 이 집의 뒤쪽으로 나온다.
위성지도로는 이 집의 뒤쪽으로 나온다.
김영일(金永一) 선생은 김영조(金永祚)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
애국지사 광산김공 휘 영조 묘갈명 병서
애국지사 광산김공이 휘는 영조 자는 영일 호는 가산이니 시조 휘 흥광의 37세손이다. 공의 15대조 휘 겸광은 순성 명량 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군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가 공안인데 이 분이 파조가 된다. 13대조 시은공 휘 의윤은 은덕 부사하고 화담 서경덕 소제 노수진 등과 도의 교분을 맺었다. 9대조 휘 승업은 충무위 상호군이다. 고조의 휘는 상원 증조는 휘는 기수 조의 휘는 재규 고의 휘는 승현이고 비는 고령박씨니 영록의 딸이다. 공은 외조 박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박공은 문경공 화서 이선생의 처 종손이며 문인이다. 이곳 정배리는 벽계와는 십리 거리로 선생이 여택재에서 문인들에게 위정척사를 역설하였는데 박공은 그 가르침을 받은이 중의 한 분이다. 외조의 가르침을 받은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걸의 기상으로 의표가 중후하며 의기와 결단성이 있어 매사에 속임이 없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성현의 도를 배우고 조상을 받들어서 사람의 근본됨을 잊지말라고 가르쳤다. 부모거상에 있어서는 예의와 슬픔을 다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6년간이나 거동하지 못했는데 공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간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부친 천장 시 이틀이 걸렸는데 공은 부친 유해를 위로해 드려야 한다며 곁에 곁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의 효심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술국치 후 국가가 쓰러지고 민족이 압박과 착취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낼 때 공은 칠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기미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양평읍내 만세운동에서 정배리 책임자로 선봉에 나섰으니 그 기상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랴 공은 서울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 회원 이정보과 연락을 취하며 은밀히 거사를 준비하여 정배리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공은 숙부 민현과 외숙 박중빈과 함께 태극기를 채롱에 담아지고 읍내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정오쯤 장터에 많은
애국지사 광산김공이 휘는 영조 자는 영일 호는 가산이니 시조 휘 흥광의 37세손이다. 공의 15대조 휘 겸광은 순성 명량 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군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가 공안인데 이 분이 파조가 된다. 13대조 시은공 휘 의윤은 은덕 부사하고 화담 서경덕 소제 노수진 등과 도의 교분을 맺었다. 9대조 휘 승업은 충무위 상호군이다. 고조의 휘는 상원 증조는 휘는 기수 조의 휘는 재규 고의 휘는 승현이고 비는 고령박씨니 영록의 딸이다. 공은 외조 박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박공은 문경공 화서 이선생의 처 종손이며 문인이다. 이곳 정배리는 벽계와는 십리 거리로 선생이 여택재에서 문인들에게 위정척사를 역설하였는데 박공은 그 가르침을 받은이 중의 한 분이다. 외조의 가르침을 받은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걸의 기상으로 의표가 중후하며 의기와 결단성이 있어 매사에 속임이 없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성현의 도를 배우고 조상을 받들어서 사람의 근본됨을 잊지말라고 가르쳤다. 부모거상에 있어서는 예의와 슬픔을 다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6년간이나 거동하지 못했는데 공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간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부친 천장 시 이틀이 걸렸는데 공은 부친 유해를 위로해 드려야 한다며 곁에 곁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의 효심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술국치 후 국가가 쓰러지고 민족이 압박과 착취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낼 때 공은 칠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기미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양평읍내 만세운동에서 정배리 책임자로 선봉에 나섰으니 그 기상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랴 공은 서울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 회원 이정보과 연락을 취하며 은밀히 거사를 준비하여 정배리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공은 숙부 민현과 외숙 박중빈과 함께 태극기를 채롱에 담아지고 읍내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정오쯤 장터에 많은
애국지사 광산김공 휘 영조 묘갈명 병서
애국지사 광산김공이 휘는 영조 자는 영일 호는 가산이니 시조 휘 흥광의 37세손이다. 공의 15대조 휘 겸광은 순성 명량 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군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가 공안인데 이 분이 파조가 된다. 13대조 시은공 휘 의윤은 은덕 부사하고 화담 서경덕 소제 노수진 등과 도의 교분을 맺었다. 9대조 휘 승업은 충무위 상호군이다. 고조의 휘는 상원 증조는 휘는 기수 조의 휘는 재규 고의 휘는 승현이고 비는 고령박씨니 영록의 딸이다. 공은 외조 박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박공은 문경공 화서 이선생의 처 종손이며 문인이다. 이곳 정배리는 벽계와는 십리 거리로 선생이 여택재에서 문인들에게 위정척사를 역설하였는데 박공은 그 가르침을 받은이 중의 한 분이다. 외조의 가르침을 받은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걸의 기상으로 의표가 중후하며 의기와 결단성이 있어 매사에 속임이 없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성현의 도를 배우고 조상을 받들어서 사람의 근본됨을 잊지말라고 가르쳤다. 부모거상에 있어서는 예의와 슬픔을 다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6년간이나 거동하지 못했는데 공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간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부친 천장 시 이틀이 걸렸는데 공은 부친 유해를 위로해 드려야 한다며 곁에 곁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의 효심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술국치 후 국가가 쓰러지고 민족이 압박과 착취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낼 때 공은 칠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기미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양평읍내 만세운동에서 정배리 책임자로 선봉에 나섰으니 그 기상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랴 공은 서울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 회원 이정보과 연락을 취하며 은밀히 거사를 준비하여 정배리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공은 숙부 민현과 외숙 박중빈과 함께 태극기를 채롱에 담아지고 읍내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정오쯤 장터에 많은
애국지사 광산김공이 휘는 영조 자는 영일 호는 가산이니 시조 휘 흥광의 37세손이다. 공의 15대조 휘 겸광은 순성 명량 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군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가 공안인데 이 분이 파조가 된다. 13대조 시은공 휘 의윤은 은덕 부사하고 화담 서경덕 소제 노수진 등과 도의 교분을 맺었다. 9대조 휘 승업은 충무위 상호군이다. 고조의 휘는 상원 증조는 휘는 기수 조의 휘는 재규 고의 휘는 승현이고 비는 고령박씨니 영록의 딸이다. 공은 외조 박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박공은 문경공 화서 이선생의 처 종손이며 문인이다. 이곳 정배리는 벽계와는 십리 거리로 선생이 여택재에서 문인들에게 위정척사를 역설하였는데 박공은 그 가르침을 받은이 중의 한 분이다. 외조의 가르침을 받은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걸의 기상으로 의표가 중후하며 의기와 결단성이 있어 매사에 속임이 없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성현의 도를 배우고 조상을 받들어서 사람의 근본됨을 잊지말라고 가르쳤다. 부모거상에 있어서는 예의와 슬픔을 다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6년간이나 거동하지 못했는데 공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간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부친 천장 시 이틀이 걸렸는데 공은 부친 유해를 위로해 드려야 한다며 곁에 곁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공의 효심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술국치 후 국가가 쓰러지고 민족이 압박과 착취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낼 때 공은 칠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기미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 양평읍내 만세운동에서 정배리 책임자로 선봉에 나섰으니 그 기상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랴 공은 서울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 회원 이정보과 연락을 취하며 은밀히 거사를 준비하여 정배리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공은 숙부 민현과 외숙 박중빈과 함께 태극기를 채롱에 담아지고 읍내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정오쯤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 군중을 주도해 갔지만 일경의 무자비한 강압으로 시위 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날의 기개와 우렁찬 함성은 민족정기의 표출로 우리 민족 정신사에 흐르고 있으니 일의 성패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공은 며칠 후에 숙부와 외숙부와 함께 일경에 피체돼 일군 양주 헌병분견소에 이송되어 5월 5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공이 피체된 지 4개월 만에 형기를 마치고 7월 말에 귀가하였는데 옥중에서 괴질로 고생하던 중이었으므로 가족에까지 전염되어 모두가 그 병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후 공은 화옹을 존모하면서 남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일로 평생을 보냈다. 공은 병신 11월 13일에 출생하여 무오 7월 26일에 별세하니 수가 83이다. 공이 하세한 지 20주년 무인에 정부에서는 공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는 능성구씨의 딸 유덕이니 부덕을 갖추었다. 시모 박씨가 중풍으로 누워있으매 정성으로 간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