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정미의병 창의비

4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123-2
탐방로그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123-2 신일사거리공원 주천 을사.정미의병창의비(酒泉乙巳 丁未義兵倡義碑)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상의(金尙儀)는 음식을 제공하고 승려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주천을사의병'이 북면 마차를 지나 정선·평창에 이르는 동안 세력은 점차 커졌다. 원용팔의병장은 첩자(諜者) 고영달(高永達)을 처단하고 우편 선로를 끊고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원용팔의병장은 1905년 8월에 원주 지정면 활곡촌에서 체포되어 1906년 서울 경성감옥에서 45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1907년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은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주천 강변에 돌단을 쌓고 의병들의 군례(軍禮)를 받으며 ‘주천정미의병(酒泉丁未義兵)’의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이 때 주천으로 집결된 의병진은 40여 부대나 되었다. 이강년과 김삿갓면에 사는 중군장(中軍將) 김상태(金尙台)의병장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으로 일본군 제47연대장 ‘나마타메(生田目新)’ 대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주천을미의병'은 수주면 전투·주천 다래산전투·영월 덕포리 독산(獨山, 여우고개)전투·남면 창동리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은 1908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제천 수비대장 ‘키지마(貴島)’ 소위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주천(酒泉)은 우리나라 최고의 구국항쟁 중심지로 금마리의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 의병장, 무릉도원면 아랫골에 살던 무곡(茂谷) 윤기영(尹起榮) 의병장, 금마리만세운동등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곳곳에 배여 있는 의병의 고장이다.
이들은 오직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분들로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며, 영월군민의 자긍심을 지켜온 애국지사들이다.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 분들의 숭고한 뜻을 역사에 길이 빛내고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빗돌을 세운다.
2020.11.17. 영월문화원
세움: 영월군수 최명서, 영월군의회의장 손경희, 영월문화원장 엄흥용
빗돌 글: 엄흥용, 빗돌글씨: 김태숙, 조각: 박찬갑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123-2 신일사거리공원 주천 을사.정미의병창의비(酒泉乙巳 丁未義兵倡義碑) 를 찾았다.
酒泉乙巳 .丁未義兵倡義碑(주천 을사.정미 의병창의비)
주천 을사·정미의병 창의비(酒泉 乙巳·丁未義兵 倡義碑)
영월은 항일의병의 중심지로 1895년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의병장은 영월 관아(官衙) 문루(門樓)에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깃발을 높이 걸고 '영월을미의병(寧越乙未義兵)'을 참의하였다. 그는 제천으로 진격하여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연합의병체제를 갖춘 후 의병대장이 되어 친일파 관리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삼계(三戒) 원용팔(元容八) 의병장은 1905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고 주천에서 '주천을사의병(酒泉乙巳義兵)'을 창의하였다. 그는 주천 금마리(金馬里)의 큰 인물이었던 박수창(朴受昌)으로부터 군자금과 화포·나귀 등을 지원받았다. 이때 박수창이 보낸 최병덕(崔炳德)과 정재식(鄭在植)이 '주천을사의병'에 합류하여 좌·우총독장(左右總督將)이 되었다. 그 당시 단양·영춘의 포군(砲軍) 100여 명과 좌변면과 우변면에 거주하던 포수들도 '주천을사의병'에 합류하였다. 원용팔의병진이 영춘(永春)을 지나 영월에 도착하자 장릉 보덕사의 승장(僧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