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탐방로그
- 충북 괴산에 위치한 추모비이며, 홍범식 고택 앞에 위치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홍공 범식 추모비
일완 홍범식선생은 1910년 금산군수로 재직하던중 망국의 비보를 듣고 통분한 나머지 자결한 순국이사이시다. 선생은 1871년 7월24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 1에서 참판 홍승목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자는 성방이고 호는 일완이며 본관은 풍산이시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사대부가로서 그의 12대조는 선조때 명신인 대사헌 이상이시다. 증조부는 동돈녕 정주로 우의정에 추증되셨고, 조부는 판돈녕부사 우길이며 부친은 중추원 찬의 승목이시다. 후손으로 4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 명희는 괴산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선생은 18세이던 1888년 성균관에 합격하여 내부주사 혜민원 참서관을 거쳐 1907년 태인군수로 임명되시었다.
당시 그곳에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뿐만아니라 백성들이 의병봉기와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죽는 일이 허다했는데 의병을 진압하려온 수배대장들을 설득하여 함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했으며 황무지개척과 수리사업에 힘쓰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그에 감동한 고을사람들이 38개 방마다 그뜻을 기리는 선정비를 세운바있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신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되어 칙서가 반포되고 경술국치를 막제되자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유서를 남기시었다. 또한 칙서에 대해서는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고 적에게 굴복함은 본래의 뜻이 아니니 차라리 돌아가신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지하에서 함께 지내길 원할지언정 난신적자와 더불어 이세상에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지어 황관내시에게 전하여 올리게하였다. 그리고 객사에 가서 배례한후 "사직은 안보하지 못하고 오늘에 으리렀사오니 불충한 신 홍범식은 죽음으로써 사죄합니다."라 하고 즉시 목을 매어 자결코자 하였으나, 뜻밖에 사령에게 발견되어 뜻대로 결행하지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시 힘써 평범한 태도로 사령이 안심하도록 담소하다가 홀연히 객사 후원인 조종산에 올라 사시사철 변함없이 홀로 청정한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장렬히 순절하시었으니 향년 40세이셨다. 장례행렬이 금산을 떠나 선영으로 향할때 군민들은 도로에 나와 호곡을 하였고 괴산까지 수백명이 따라와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선생은 괴산읍 제월리 선영에 봉안되어 고히 잠들고 계시며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무릇 사람들은 모두 각각 충의의 천성을 가졌다지만 그처지
에 이르러 실천한자 그누구인가? 나라가 어려울때 공은 충성과 위대한 절개를 몸소 실천하신 선생의 숭고함은 천추만대의 귀감이 되어 선생의 고향인 괴산에서는 충청북도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하늘도 감동하시어 대한민국 광복의 기쁨을 주시지 않았던가!
오로지 선경지명으로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선생의 충절을 괴산군민을 비롯한 우리 후예들은 머리숙여 추모하며 그 뜻을 기리보전하리라 다짐하는바이다
오로지 선경지명으로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선생의 충절을 괴산군민을 비롯한 우리 후예들은 머리숙여 추모하며 그 뜻을 기리보전하리라 다짐하는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