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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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53-1
탐방로그
독립유공자 공적비를 찾기 위해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에 위치한 중앙탑공원에 왔다. 탑 중앙 하단에는 공적비의 건립문을 새긴 비석이, 왼편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추념시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충주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새긴 비석이 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나는 조국을 광복코저 이 몸 바쳤노라.
건립문
일본에 빼앗긴 국권과 조국을 찾고자 국내외에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지푸라기와 같이 여겨 조국의 수호신으로서 목숨을 바친 거룩한 애국선열들의 호국 정신을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충주시와 후손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곳에 독립 유공 공적비를 세운다.
공적비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유공자 분들의 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공적비를 둘러싸고 있는 명각비는 대한민국 산천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유공자 분들의 공적을 담고 있다.
건립연월일 : 2012년 12월 23일 / 건립추진 : 광복회 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 건립지원 : 충주시
건립디자인 : 한국교통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이혁수 / 시공업체 : 대원석재 주식회사
김홍규, 박용의, 추성열, 장양헌, 어윤희

김홍규(金弘奎) 1876~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서울 출신의 천도교인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당시 수송동에 있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의 공장 감독으로서, 2월 27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월보과장이며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도록 부탁 받았다. 이에 이날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다른 직공들과 함께 약2만1천매의 선언서를 인쇄하여 이종일에게 넘겨주어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모인 독립만세 시위군중 및 전국 각지에 배포하여, 민족적인 거사를 계획대로 추진하게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용의(朴容義) 1869.12.08~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4월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용의는 손병희 등이 주도한 독립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고, 1919년 4월 9일경 장강환.김응순 등과 4월 10일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4월 9일 오후 송원흥 등에게 거성리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4월 10일에는 거성리 주민 20~30명을 설득하여 거성리 시장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용의는 4월 23일에도 장강환과 함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설득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안협면 헌병분견소에 가서 갖고 간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체포된 박용의는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추성열(秋成烈) 1887.02.13~1970.09.09 / 3.1운동 / 대통령 표창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한천 시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설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 행진을 하던 중 소이면 경찰관 주재소에 동지인 김을경 이중근이 검거되자 군중을 향하여 구금자 탈환에 전력을 다하자고 절규 고무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그해 5월 22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24일 경성 복심 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장양헌(張良憲) 1898.04.19~1984.08.14 / 3.1운동 / 대통령 표창
1919년 4월 8일 충주면 칠금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충주 장날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던 중 피체되었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0일 경, 충주 간이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린 범바위에서, 이날 참석했던 교사 유흥식과 학생 오언영.장천석.유석보 등이 충주 장날인 3월 15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면서 추진되었다. 서울 신학교 재학중이던 장양헌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경고문을 비밀리에 교회 안에서 수백 매를 복사하였으며, 기독교회측과 연계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결정에 따라, 교회측과의 연락을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비밀이 거사 전에 탄로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고문은 최집사 등에 의해 각처에 배포되었고, 시위장소는 탄금대로 바뀌어 계속해서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였다. 장양헌은 4월 8일 경 충주 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연순에게 독립운동계획서를 보내어, 충주 장날 만세운동에 동교 여학생들을 참가시키도록 하자는 권유문을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장양헌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을 고취시키는 문장을 쓰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와 경고문, 독립가와 일반 태극기 10여 개를 우여곡절 끝에 김연순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번 독립만세 시위운동도 결국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일경에게 피체되어, 이해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어윤희(魚允姬) 1881.06.20~1961.11.18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북본정.동본정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태동, 김국주, 조병일, 채찬, 신응규

신태동(申泰東) 1902.03.20~1959.01.30 / 3.1운동 / 대통령 표창
1919년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계획에 동참하여 경고문을 인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당시 서울 중앙학교에 다니던 신영호는 고향 청주로 내려오는 길에 수원에서 '아(我)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제목의 독립사상 고취 경고문을 입수하여 3월 9일 아침 청주농업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였다. 이때 동교 학생이던 신태동은 임창수.이철우.박승하 등 학생들과 함께 김현구의 집으로 가서 함께 경고문 3백여 매를 등사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국주(金國柱) 1891.04.03~1957.07.20 / 정의부 / 건국훈장 애족장
1908년 3월경 부친 김병철을 따라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1922년 8월에는 봉천성 환인현에서 채상덕.김동삼 등이 조직한 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통의부 제4중대의 3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무장대원 12명을 이끌고 소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간도에서 조직된 정의부의 소대장으로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무력항쟁을 수행하다가 1945년 길림성 쌍성진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일(曺秉一) 1886~1920.11.26 / 만주 방면 / 건국훈장 애국장
만주에서 독립군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특히 1920년 상반기에는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투쟁도 전개되어 일본군들을 자극하였다. 이에 일본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군대출병의 명분을 갖고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병일은 길림성 연길현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다가 1920년 11월 26일, 연길현 양지촌에서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찬(蔡燦) / 만주노령 방면 / 건국훈장 독립장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합니하 산골에서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김유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즙안.통화.임강.유하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보민회.강립단 수십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 결사대 수백명을 조직하여 강계 어뢰면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재등실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응규(申應奎) 1884.01.01~1927.05.16 / 만주 방면 / 건국훈장 애국장
평산신씨 판사공파 30세손으로 조선말 만주지방으로 집을 떠나 그곳에서 나라잃음을 슬퍼하다가 1919년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음력 8월 17일경 지나 장백현내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군비단에 가입 통신원으로서 불은반서의 송달일에 종사하였음. 다시 1920년 음력 3월 중순경 중국 임강현 삼도구 화개산에서 동일 목적으로 조직된 태극단에 가입하여 임강현 팔도구에서 이주선인을 권유하여 입단시키고 각입단자로부터 입단금을 징수하는 사무에 종사하였고 또한, 동현 5도구 부근의 동단원의 이동조사와 이주선인으로부터 군수품과 짚신 등을 징수하는 사무에 종사하였음. 다시 1921년 음력 10월중 위각 단체를 통일하여 광정단이라고 개칭하는데 동단의 민정 위언이 되어 임강현 팔도구 화산각지에서 이주선인의 이동조사와 군자군량의 징수 및 기타 사무에 종사하였음. 신응규는 위 최찬성등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그의 의뢰를 받아 범행을 도울 의사로 동일 팔도구 자신이 집으로부터 김양률의 집까지 안내하여 범행을 용이하게 하였음.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재판소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어 수형생활중 회복 불능한 중병에 걸려서 가석방 되어 고향집에 들어와 순국하셨음. 정부에서는 2008년 8월 15일 광복절 63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장손자 신종무가 수상하였다.
유돈상, 서상경, 최성천, 윤희선

유돈상(柳敦相) / 만주 방면 / 건국훈장 애족장
춘천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손자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경 조부 유홍석, 재종조, 의암, 유인석, 부친 유제원, 모친 윤희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5년에는 선대의 독립정신과 그 유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마침내 음성국, 음성진 등 180여 명의 동지를 얻어서 조선독립단 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홍익단과 합세하여 왜적을 치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일제의 앞잡이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일제의 급습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피신한 그는 효준 또는 효남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다시 독립투쟁의 계획을 세웠다. 그 후 독립군 양성이 절실함을 깨닫고 학교를 세우고 민족정신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북 진천 등지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순에서 독립단을 재조직하여 활동, 1935년 청년단들을 교육하던 중 일제의 급습으로 피체되어 모진 고문 끝에 동년 7월 19일 4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상경(徐相庚) 1900.08.22~1962.12.07 / 문화운동 / 건국훈장 애국장
청주농업학교 재학중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 300매를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3월 19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공명하고 1923년 9월 1일 일본 동경에서 박열 등 기타 동지들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으며, 흑도회에 가입하여 잡지 [흑도]의 발행에 참여하였다. 귀국 후 1925년 1월에 충주에서, 서정기 등 3명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흑기연맹을 조직하여 무정부주의 연구와 선전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9년 2월 18일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읍내리 금성여관에서 권오순.안동규.김학원.정진복.서정기.김현국 등 동지들과 함께 문예운동사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잡지 [문예운동]을 간행하려고 활동하다가 또다시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1930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햇으나, 1930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성천(崔聖天) 1885~1910 / 의병 / 건국훈장 독립장
처음 김상태 의진에 참여하였고, 이후 의병장으로 경북 예천.봉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김상태 의병장은 충북 영춘 출신으로 1차 의병과 2차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듬해 이강년이 문경에서 거의하자 김상태는 그와 형제지의를 맺고 이 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륵약이 체결되어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김상태는 즉각 동지 정운경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07년 7월 이강년이 다시 거의하자 이 의진과 합진하였다. 이후 1908년 6월 4일 청풍 까지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피체되자 김상태 의병장은 군사 지휘권을 인계받아 대일항전을 지속하였다. 최성천은 이같은 김상태 의진에 1908년 6월 경부터 참여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밀정 권흑이의 밀고로 피체되었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는 10명 내지 20명 정도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김상태.한명만.정경태.윤국범 의진과 더불어 소백산을 근거지로 대일 항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0년 1월 2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서리에서, 그리고 2월 6일에는 같은 수곡리에서 군자금 수합활동을 하였다. 나아가 같은 해 3월 26일에는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북 예천군 왕천시장에서 군수금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인 산내은삼랑을 처단하였다. 이같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1910년 11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희선(尹熹善) 1872.11.26~1932.11.19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갔다. 나아가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의 진위대와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1907년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3월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 해산병이 주축이 된 민긍호 의진과 합세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추치전투, 죽령전투, 고리평전투, 백자동전투 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이강년 의진에서 윤희선은 소모중군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민철훈, 조응삼, 정시항, 주광식, 권용창

민철훈(閔喆薰) ~1895.05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891년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시켜갔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개입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가 변화하면서 친일세력이 약화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급기야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일제는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양반 유생 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철훈은 원래 기개있는 선비로서 국모시해 이후 복수보형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자, 이듬해 1896년 초 유인석 의진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인석 의진에서 여러전투에 참가하다가 제천에 회집하여 있었는데, 남한산성 의진을 함락시킨 참령 장기렴의 관군들이 일본군과 함께 제천으로 이동하여 4월 23일 가흥에 도착하였다. 이후 한달 동안 관군과 의병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던 중 5월 경 신지수의 군사가 적진에 가까이 가서 불을 지르려 하다가 적군에 발각되어 퇴군하였다. 적군은 의진이 후퇴한 틈을 이용하여 의병에 조력한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이 때 그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응삼(趙應三) 1875.08.14~1956.06.25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1907년 8월 23일 정봉준 의진에 입진하였다. 당시 정미7조약에 이어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강화도의 진위대가 의병으로 전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대중화되었다. 이에 강원도 원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의병장 이은찬.이구재가 5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7월에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이를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 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모하였다. 이리하여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13도 연합 의진이 구성되고 있을 때, 이에 고무를 받은 조응삼은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를 가지고 지평.원주 등지에서 9월 중순까지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직후 그의 부대는 이인영의 13도 연합 의진 휘하에 흡수되어 서울 진격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체포된 조응삼은 공주지방재판소로 압송되어 소위 폭동죄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시항(鄭時恒) 1867~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정봉준.김학선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도와 강원도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충청도 음성 금광에서 광부로 일하던 정시항은 이같은 시기인 1907년 7월 정봉준 의진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정봉준은 1905년 11월 [을사륵약] 체결 직후 의병을 일으킨 뒤, 1907년 8월부터 경북 문경.청풍, 충청도 괴산.충주,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지평 등지를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의병장이었다. 이후 그는 정봉준 의병장을 따라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정낙인의 의진과 합진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12월 상업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다시 김학선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같은 해 음력 5월 초 충주 노은리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8년 7월 31일 평리원에서 유형 15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광식(朱光植) 1874.09.30~1957.03.05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주광식은 이강년이 재거의 할 때 참여하여 병력과 물자를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충북.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9월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원주에서 민긍호 의진과 연합하여 적군과 교전하였고, 9월말 9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여 후군장을 맡아 강원도 인제.홍천.양양.고성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12월 300여 명의 군사들을 지휘하며 강원도 영월군 수인면 구림동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펼쳤고, 1908년 2월에서 3월 사이 인제군 북면 설악산의 오세암을 근거지로 인근지여게서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용창(權用昌) 1886.04.08~1050.12.17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1906년 7월 이강년이 충북 단양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군, 사방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소모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좌종사가 되어 단양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뒤 그는 이강년 의병대장이 1908년 6월 전상으로 청풍 작성에서 피체될 때까지 함께 종군하였으나, 곧이어 일경에 피체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백치중, 백남규, 유제함, 유석현, 하유원

백치중(白致重) ~1908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백치중은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8년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던 백남규의 휘하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강년 의진은 1907년 단양.제천.원주.연풍.영월.횡성.강릉.청풍.충주.문경.예천.영주.봉화.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는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동년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교전하여 적 200여 명을 생포하였으며, 동년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생포하였고,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생포하였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생포하는 등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백치중은 이 일월산전투에서 백남규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백남규(白南奎) 1884.08.22~1970.02.19 / 의병 / 건국훈장 독립장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 진위대 부위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국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강제 해산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백명을 거느리고 왜병과 접전하였다. 그때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이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에서 유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나 뵈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강년의 인품에 감복되어 그와 합진할 것을 결의하고 부하 8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으로 임명되었다. 9월 16일 추치에 복병하였다가 적 2백 명을 사로잡았다. 백남규는 좌선봉 하한서, 우선봉 권용일과 함께 추치로 가서 복병하였다가 적을 사로잡게 된것이다.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백남규가 돌아와 우선봉의 임무를 맡게 되어 다시 의진의 진용을 수습하였다.
의병장-이강년 도선장-윤용구 우선봉-백남규 우군장-변학기 우익장-정연철
1908년 6월 의병장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된 뒤에는, 김상태가 의진의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백남규는 그 일부대를 나누어 가지고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에는 상해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거듭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제함(柳濟咸) 1884.10.26~1960.01.11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의암 유인석의 양자이다. 부친 유인석은 을미의병 실패 후 요동으로 망명하였다가 일시 귀국하였으나 정미의병때인 1907년 음력 1월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나 불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그 후 유제함은 망명한 부친을 대리하여 국내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08년 2월 의암이 국내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운강 이강년에게 보내는 격려서신과 격문을 김호원과 함께 전달하여 운강의 의병운동을 고무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6월 의암이 망명한 후 가족에 대한 적의 감시가 점차 엄중하여져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의암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의암의 활동을 뒷바라지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석현(柳錫鉉) 1900.05.04~1987.08.28 / 의열단 / 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약 중 일경의 추적을 받아 같은 해 11월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7월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2년 2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입국하였다. 1922년 12월 김지섭 등과 함께 무교동 백윤화 판사를 협박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923년 5월을 기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전달받았다. 그는 김시현.황옥.김지섭 등 동지를 규합하여 무기반입을 모의, 북경에서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천매 등을 소지하여 입국, 거사를 계획 중 밀고자에 의해 1923년 3월 15일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후 만기출옥하여 194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유원(河有元) 1911.06.17~1938.07.05 / 일본 방면 / 건국훈장 애족장
1932년 3월 26일 해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시에 주동자로 피체되었다. 그에 따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법률위반 및 건조물 손괴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1934년 2월 15일 전 협 동경지부 강동지구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중에 동경경시청에 피체되었다. 1935년 10월 15일 동경지방법원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장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1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재수감되었다가 1937년 4월 8일 폐결핵으로 가출옥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승로, 정태희, 정원택, 안병구, 권태응

홍승로(洪承魯) 1894.06.13~1964.12.17 / 일본 방면 / 건국훈장 애족장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화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 이은과 일본의 이본 궁녀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도깁에 장애가 도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로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게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태희(鄭泰熙) 1898.01.08~1952.03.19 / 임시정부 중국 방면 / 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1독립운동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각도대표 박인관 정덕생 박승명 등과 1919년 10월 2일 평양에 모여 대한국민총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지원, 민지개발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919년 12월에 상해의 임시정부내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의 참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제6회 간사회에서 간사로 피선되어 광복활동을 하였다. 1923년 5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 제1과 상임위원회의 상임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27년 1월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 기초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8년 8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9일에는 상해 교민단의 총무로 피선되어 교민들의 안전과 재산보호 등에 힘쓰며 사회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목적으로 입국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34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원택(鄭元澤) 1890.09.27~1971.11.28 / 임시정부 / 건국훈장 애국장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상해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8년에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 노령에서 인수하여 전달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 의군부의 조직에 참여하여 서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1919년 4월에는 의군부의 기밀사로 상해에 출장하여 이동녕등과 함께 길림의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 새로운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임시정부 임시 의정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회의에 참석하였다. 의정원 의원 김덕진과 함께 국내로 밀파하여 귀국 도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안병구(安秉九) 1922.10.28~2007.04.26 / 학생운동 / 건국포장
1940년 9월 서울 조선문화학원 중등과 재학 중 손용우 등과 함께 동교생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종호 등이 동월 28일 사직공원 정문 앞 국세조사선전 입간판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한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1942년 2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권태응(權泰應) 1918.04.20~1951.03.28 / 학생운동 / 대통령 표창
1935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최인형.염흥섭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UTR구락부에 가입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했다. UTR구락부는 원래 급우생들의 친목모임으로 출발했으나, 학교측의 민족차별과 노예교육에 반발하면서 항일학생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1937년 3월 4일 동교 졸업식 당일 친일적 발언을 일삼던 친일학생들을 구타하여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와세다대학에 재학하던 중 쥬오대학에 다니던 UTR구락부 동지 염홍섭 등과 함께 공산주의를 선전 계몽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1937년 9월 재도쿄 경성고보 제33회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사회주의 학습반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 모임을 중심으로 1939년 5월까지 조국의 독립 및 신사회의 실현방안을 논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철동, 원종응, 정낙윤, 정태영, 김희영

박철동(朴喆東) 1915~1941.12.12 / 중국 방면 / 건국훈장 애국장
충주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한 후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1931년 2월 중국 심양으로 탈출하였다. 1933년 남경 출발하였다. 일경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탈출한 후 1934년 1월초에 낙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들어갔다. 그 뒤 1년 반 후 동교를 졸업한 그는 1935년 7월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 해 혁명당의 명령에 따라 화남으로 파견되어 가던 도중 복건 천주 나루터에서 일군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곧 일본 큐슈로 압송되어 징역 3년을 받고 큐슈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가을 출옥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머무르다가 일경의 눈을 피하여 중국의 운성으로 탈출하였다. 운성에 도착한 후 애국청년들을 모아 반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낙양의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1941년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원종응(元鍾應) 1909.04.14~1991.03.24 / 국내항일 / 건국포장
1932년 5월 충남 대전에서 충남전위동맹과 비밀결사 적색소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용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학당에서 2년간 재학하다가 중도 퇴학하였다. 1932년 1월경부터 4,5개월간 잡지 지사를 경영하고, 그해 5월 1일 충남 대전군 외남면 고산사의 뒷산에서 정창세.유의영.강창기.이병주 등과 함께 충남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원종응은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한편 대전전위동맹 외에도 비밀결사 단체인 적색소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5년 7월경에 대전중학교 학생반 및 무수리 농민독서회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하는 등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11월경 원종응은 대전군 시제사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전개하자 이를 격려하는 내용의 격문을 인쇄,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게 피체되어 1934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정부는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낙윤(鄭樂倫) 1885~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조국의 광복을 쟁취할 목적으로 1919년 6월 서울에서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특별단원으로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동년 11월 애국부인회가 일경에 탐지됨과 동시에 청년 외교단도 노출되어 이병철,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등의 단원들이 체포되었다. 다행이 상해로 피신하였으나, 1920년 6월 29일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해사부 참사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는데 임시의정원 의원인 조덕진, 강진우 등과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이 시급하다는데 의견이 합지 되었다. 1921년 2월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띄고 다시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21년 7월 서울 사직동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고 하며 1927년 2월 6일에는 만주 봉황성에서 교민들이 봉성 농우회를 조직하자 박광, 강한조, 조익수, 김정한 등과 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정태영(鄭泰榮) 1888.10.13~1959.05.07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가 독립을 선언할 당시 그는 종로 보신각의 종을 울려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다. 그후 1919년 외교론의 방략 아래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청년이 주체가 되어 결성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 활동하였다. 동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국내의 회령.충주.대전 등지에 지부를 두는 한편 해외에 상해 지부를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단은 주로 외교활동에 치중하여 외교원의 해외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를 발간하였고, 아울러 자매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함께 중부 이남지역에서 연통부와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도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포함)을 추서하였다.
김희영(金熙暎) 1892.01.08~1975.01.01 / 국내항일 / 건국포장
1924년 9월 전북 익산에서 이봉길, 장일환과 함께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갑자연구회에 가입하여 월례회를 개최하고 강연활동을 하였다. 이후 단체명을 갑자연구회에서 민중운동동맹으로 개칭하고 같은 해 11월 2일 정기회에서 기관지 '민중운동' 발간을 결의하였다. 김희영은 편집을 맡아 1925년 1월 7일 서울 공평동 대동인쇄회사에서 잡지를 인쇄 출판하여 회원 다수에게 우송하기로 계획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희영은 1925년 12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병철, 최봉기, 엄정섭, 김의대

이병철(李秉徹) 1899~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중앙기독청년회를 중심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1919년 4월 자신의 처 경하순을 비롯하여 김원경.최숙자 등 기독교계통 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지도하여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동 부인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여성단체의 초기 활동은 회원들의 자수 등으로 얻어진 자금모집이 주된 것이었고, 자금은 투옥 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구조.후원에 사용되어졌다. 한편 그는 1919년 5월초 상해로부터 귀국한 조용주.연병호 등과 뜻을 모아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하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고, 총무의 일을 맡아 활동을 주관했다. 특히 동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함으로써 재정적 지원에 큰 힘을 미쳤다. 또한 그가 지도하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을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연결시켜 조직 확충에도 힘을 쏟았다. 이와 함께 동년 6월에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혈성단애국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발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 활동에도 활약을 하여 1919년 8월경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애국급수합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동년 9월에 그는 이종욱과 함께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외의 국재 지부로서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를 설치하고, 앞서 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적십자 활동을 가세시켜 운동 방향을 강화해갔는데, 이병철은 대한총지부의 간사를 맡았다. 이러한 활동의 추진과 함께 이병철 등 청년외교단의 중심 인사들은 동년 10월초 동단이 조직을 확대.개편하기로 결정하고 그 명칭을 배달청년당으로 개칭하기로 했다. 이때 조직개편의 기본방침은 청년외교단과 비슷한 성격의 활동을 펴는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직전인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피체된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1921년 1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원심대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최봉기(崔琫基) 1894.04.01~1975.08.04 / 국내항일 / 대통령표창
1919년 10월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동지규합과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경북 문경읍 신분면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건'이라는 운동비 출자권유서를 만들어 복사지로 2통, 묵필로 1통을 작성하여 시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3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엄정섭(嚴正燮) 1985.11.27~1960.06.11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엄정섭은 1915년 음력 7월 15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박상진 등 200여명의 맹원과 함께 광복회에 가담하였다. 1917년 10월 장두환 등과 상의하여 충청남도를 3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각군의 부호들을 사전에 조사해 두었으며 11월초순경 예산군 광시면 김한종의 집에서 우이현 김재창 김경태와 함께 회합한 자리에서 우이현으로부터 권총 2정을 넘겨받고 독립군 자금을 모집할 것을 지시받았다. 11월 9일 엄정섭을 김재창 김경태와 함께 아산군 도방면 장용급의 집에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금 13원을 모금하는 등 1917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서 충남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의대(金義大) 1892.1.29~1925.7.20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4월 1일 장연면 오가리 주민 백여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연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그날밤 같은 마을의 서당교사인 김의현의 집으로 주민들을 모이게 하여 다시 면사무소를 습격할 것을 계획하고, 김의현과 함께 인근에 추점리.광진리.방곡리.조곡리로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작성하여 보낸 결과 양신집.김일곤.지도원.정해문 등의 동지가 가세하였다. 4월 2일 밤 각리로부터 2백여 명이 집결하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모두 부수고 집기와 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이때 파기된 서류는 때마침 강풍에 날려 이웃인 연풍면과 상모면까지 날아갔으며, 시위 군중들은 다시 면장 사택을 습격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해 11월 16일 고등법원에서 1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중앙탑공원에 새롭게 건립된 독립유공자 공적비를 찾아왔다.
독립유공자 공적비
추념시
아침에 고은 빛 비쳐 이 강상 밝아도 국권 잃고 울부짖던 선열 누으셨네
빼앗긴 나라 찾고자 그 몸 제물 되니 제단 위에 황촉 불꽃 정기어리네
도처청산 집을 삼고 가진 고생하여 검산 도수 돌진하던 선열 누으셨네
겨레를 살리려고 그 생명 바쳤네 향로 안에 피는 향기 영기 솟으려네
광복대업 이루려고 일생을 다하신 조국의 수호신 되어 선열 누으셨네
그 힘으로 우리살고 그 덕에 자손 하네 청사에 빛난 이름 천추에 정기되네
나라위해 목숨 바친 님이 그립고나 다시 만나 볼 수 없는 선열 누으셨네
우리강토 자유 얻고 겨레 살으리니 안심하사 천국에서 길이 쉬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