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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491-6
- 탐방로그
-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491-6 조기암마을 경로당옆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어윤희, 홍승로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어윤희(魚允姬)
생 졸 1880.06.20 ~ 1961.11.18
운동계열 3.1운동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북도 충주 출생.
어현중(魚玄仲)(어헌우 魚憲愚)의 무남독녀로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3.1운동당시 그는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開城)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忠橋)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滿月町)·북본정(北本町)·동본정(東本町)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생 졸 1880.06.20 ~ 1961.11.18
운동계열 3.1운동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북도 충주 출생.
어현중(魚玄仲)(어헌우 魚憲愚)의 무남독녀로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3.1운동당시 그는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開城)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忠橋)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滿月町)·북본정(北本町)·동본정(東本町)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홍성로(洪承魯)
생 졸 1895.06.14 ~ 1962.12.14
운동계열 일본방면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북도 충주 출생.
경성보통고등학교 졸업. 1916년 대동법률전문학교 졸업.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1년 매국노 민원식 배후주동자로 피체되었고 1922년 내일동포 교육기관인 근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생 졸 1895.06.14 ~ 1962.12.14
운동계열 일본방면
훈격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북도 충주 출생.
경성보통고등학교 졸업. 1916년 대동법률전문학교 졸업.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1년 매국노 민원식 배후주동자로 피체되었고 1922년 내일동포 교육기관인 근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491-6 조기암마을 경로당옆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어윤희, 홍승로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
조기암경로당.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어윤희 홍승로 추모비
건립문
내 몸은 묶일지언정 내 마음은 묶을 수 없을 것이다. 어윤희, 일경에 피체되어 갈 때 하셨던 말씀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맞서 자주독립을 외치며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일 투쟁 운동을 하신 이 고장 출신 어윤희, 홍승로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그 공훈을 비에 담아 국민에게 알리어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애국정신을 게승하고저 이 고장 주민의 뜻으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추모비를 세운다.
건립년도 : 2021년 11월 11일
건립제의 :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조기암 주민일동
건립추진 : 광복회 충북지부 북부연합지회
건립지원 : 충주시
내 몸은 묶일지언정 내 마음은 묶을 수 없을 것이다. 어윤희, 일경에 피체되어 갈 때 하셨던 말씀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맞서 자주독립을 외치며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일 투쟁 운동을 하신 이 고장 출신 어윤희, 홍승로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그 공훈을 비에 담아 국민에게 알리어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애국정신을 게승하고저 이 고장 주민의 뜻으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추모비를 세운다.
건립년도 : 2021년 11월 11일
건립제의 :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조기암 주민일동
건립추진 : 광복회 충북지부 북부연합지회
건립지원 : 충주시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어윤희 홍승로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