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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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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산13-1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앞에는 덕신학교옆 재실 앞에 있던 안내판과 추가로 만든 것이 서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산13-1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맞은편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고해서 다시 찾았다.
앞서 탐방했었던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덕신학교등은 아래 앨범을 같이 보시길..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앞서 탐방했었던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덕신학교등은 아래 앨범을 같이 보시길..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앞에는 덕신학교옆 재실 앞에 있던 안내판과 추가로 만든 것이 서 있었다.
자랑스러운 덕촌마을
* 덕촌리는 하동정씨 입향조 부사직공 광업께서 450여년전 이곳 청주군 서강의 이하의지역 차령산맥 줄기하에응봉산을 주산으로 부모산을 안산으로하여 터전을 잡고 덕절이라 이름하였고, 덕과 빛을 낼 인재가 크게 배출될 동네라하여 덕광촌이라고도 하였다.
* 2019년 처우시 마을 아카이브 제1호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로 선정되어 우리 마을 기록이 유산으로 길이 남을 수 있게 되었다.
* 1909년 설립된 덕촌교회는 덕신학교 교육운영에 적극 협력하여 신학문 교육에 큰역활을 하였고 농촌계몽과 사회교육, 근로, 기계, 축산협동반운영, 덕촌신협과 덕촌소협 설립 운영등 마을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 반백년의 역사를 품은 덕촌신협은 전국 유일의 리단위지역 신협이며, 자조,자립,협동의 농촌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던 시기 1968년 1월 19일 설립되었다. 설립초기 마을협동 및 지역사회개발 일환으로 완두콩 재배, 단무지등을 공동생산 판매를 주도하여 주민 모두가 큰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 덕촌리는 하동정씨 입향조 부사직공 광업께서 450여년전 이곳 청주군 서강의 이하의지역 차령산맥 줄기하에응봉산을 주산으로 부모산을 안산으로하여 터전을 잡고 덕절이라 이름하였고, 덕과 빛을 낼 인재가 크게 배출될 동네라하여 덕광촌이라고도 하였다.
* 2019년 처우시 마을 아카이브 제1호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로 선정되어 우리 마을 기록이 유산으로 길이 남을 수 있게 되었다.
* 1909년 설립된 덕촌교회는 덕신학교 교육운영에 적극 협력하여 신학문 교육에 큰역활을 하였고 농촌계몽과 사회교육, 근로, 기계, 축산협동반운영, 덕촌신협과 덕촌소협 설립 운영등 마을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 반백년의 역사를 품은 덕촌신협은 전국 유일의 리단위지역 신협이며, 자조,자립,협동의 농촌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던 시기 1968년 1월 19일 설립되었다. 설립초기 마을협동 및 지역사회개발 일환으로 완두콩 재배, 단무지등을 공동생산 판매를 주도하여 주민 모두가 큰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덕신학교(德新學校)
* 단기 4239년(서기 1906년) 5월 15일 사립 덕신학교설립. 1905년 일제의 을사늑양의 강제로 인해 망국의 위기의식이 국권회복 운동이 치열하게 봉기하면서 사립학교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씨 종중은 재산을 희사하여 학교 설립 기금을 적립하고, 1907년 1월 20일 한국학부의 인가를 얻어 사립덕신학교를 설립하였다.
* 청주지역 8개학교 중 2번쨰로 큰 학교로 1909년 교원 수 3명 학생 수 45명이었고, 1916년도에는 학생이 85명 재학했다.
* 현 건물은 역사적인 학교를 복원하자는 의견을 하동정씨 청주종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201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 단기 4239년(서기 1906년) 5월 15일 사립 덕신학교설립. 1905년 일제의 을사늑양의 강제로 인해 망국의 위기의식이 국권회복 운동이 치열하게 봉기하면서 사립학교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씨 종중은 재산을 희사하여 학교 설립 기금을 적립하고, 1907년 1월 20일 한국학부의 인가를 얻어 사립덕신학교를 설립하였다.
* 청주지역 8개학교 중 2번쨰로 큰 학교로 1909년 교원 수 3명 학생 수 45명이었고, 1916년도에는 학생이 85명 재학했다.
* 현 건물은 역사적인 학교를 복원하자는 의견을 하동정씨 청주종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201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독립운동가 정순만
* 정순만은 1873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했다.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는 간부로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다. 귀향후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 종재를 내어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 하였다.
* 190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중국 조선족 교육사의 서막인 서전서숙을 설립 후 운영했다.
*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안중근의사 의거때에는 계획을 주도하였고, 안의사 구명 운동등 독립운동가로 격렬히 활약하였다.
*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정순만은 1873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했다.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는 간부로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다. 귀향후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 종재를 내어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 하였다.
* 190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중국 조선족 교육사의 서막인 서전서숙을 설립 후 운영했다.
*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안중근의사 의거때에는 계획을 주도하였고, 안의사 구명 운동등 독립운동가로 격렬히 활약하였다.
*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 정양필
* 정순만의 아들로 1905년 2월 박용만, 유일한, 정한경과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1909년 6월 박용만이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교한 후 졸업.
* 1919년 13도 대표들의 비밀회의로 선출된 국민대표 25명중 1명으로써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으로 선임.
* 1920년 미국에서 이화숙과 결혼 후 1922년 정안회사를 세워 구국운동에 재정을 제원.
* 1942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 총회회원으로 활동하며 군자금 제공등 일생을 조국 국권 회복운동을 위해 헌신.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정순만의 아들로 1905년 2월 박용만, 유일한, 정한경과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1909년 6월 박용만이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교한 후 졸업.
* 1919년 13도 대표들의 비밀회의로 선출된 국민대표 25명중 1명으로써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으로 선임.
* 1920년 미국에서 이화숙과 결혼 후 1922년 정안회사를 세워 구국운동에 재정을 제원.
* 1942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 총회회원으로 활동하며 군자금 제공등 일생을 조국 국권 회복운동을 위해 헌신.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가 이화숙
*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며느리이며 정양필의 부인.
*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3.1만세후 임시정부 창립때 작성된 공약삼장의 대한민족 대표 30인중 1면으로 참가후 상해로 망명
*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선출 10월에는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를 돕고 조선인의 정착을 위해 일하며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
* 상해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 재정지원과 동포 구원 활동. 1920년 임시정부의 외각후원단체인 민단의 상의원으로 활동하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양필과 결혼 후 독립운동자금 출현등 조국독립을 위한 후원활동에 전력.
*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12명중 1명으로 충북여성플라자 흉상 전시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며느리이며 정양필의 부인.
*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3.1만세후 임시정부 창립때 작성된 공약삼장의 대한민족 대표 30인중 1면으로 참가후 상해로 망명
*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선출 10월에는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를 돕고 조선인의 정착을 위해 일하며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
* 상해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 재정지원과 동포 구원 활동. 1920년 임시정부의 외각후원단체인 민단의 상의원으로 활동하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양필과 결혼 후 독립운동자금 출현등 조국독립을 위한 후원활동에 전력.
*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12명중 1명으로 충북여성플라자 흉상 전시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애국지사 검은 정순만 선생 서거 110주년을 의미하는 110그루의 무궁화와 11그루의 소나무가 식재되어있다.
독립운동가 추모동산
독립운동가 추모동산
여기는 독립운동가 세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무궁화 동산입니다. 검은 정순만선생 서거 110주년을 맞이하여 님의 숭고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하고 지역 주민과 후손들의 뜻을 모아 고향마을 덕촌 삼성골 선영하에 나라꼬 무궁화 110주와 늘푸른 소나무 11주를 심고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 세분을 마음깊이 추모합니다.
2021년 6월 1일
독립운동가 검은 정순만(1873~1911) 198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아들 정양필(1893~1974)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자부 이화숙(1893~1978)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여기는 독립운동가 세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무궁화 동산입니다. 검은 정순만선생 서거 110주년을 맞이하여 님의 숭고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하고 지역 주민과 후손들의 뜻을 모아 고향마을 덕촌 삼성골 선영하에 나라꼬 무궁화 110주와 늘푸른 소나무 11주를 심고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 세분을 마음깊이 추모합니다.
2021년 6월 1일
독립운동가 검은 정순만(1873~1911) 198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아들 정양필(1893~1974)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자부 이화숙(1893~1978)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정순만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에 묘소가 있었지만 실전되었고, 정양필, 이화숙 지사의 묘소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의 민족혼을 기리며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의 민족혼을 기리며
여기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덕절마을은 하동정씨 문절공후 유수공 청주파문중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과 정양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정순만(鄭淳萬,1873~1911)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추서. 당대에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던 인물로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물론 망명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한 선구자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를 이끌고 보안회 활동을 주도하며 일제에 맞섰고, 1905년 을사늑약에 분연히 얼어나 반대투쟁을 주도하였다. 고향에서는 문중과 힘을 모아 덕신학교를 세워 청주지역의 근대교육을 선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끼자, 이상설, 이동녕 등 동지와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불디보스토크로 옮긴 후에는 헤이그 특사파견 지원,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창간과 주필 활동, 동의회 참여와 안중근 의거 계획 등 망국을 전후한 시기까지 민족운도사의 중요한 순간에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1911년 연해주 한인사회 분파와 파쟁의 희생양으로 38년의 짧은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쳤으나, 연해주 한인사회의 반성과 단합을 촉구하여 권업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작지않다.
그의 아들 정양필(鄭良弼, 1893~1974)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05년 박용만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고학으로 커니 군사고등학교(Kerney Military Academy)를 졸업하고, 191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른바 한성정부의 평정관에 선임되어 일찍이 독립운동계에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후 미국에 계속 거주하며 유일한과 동업으로 회사를 경영하였고, 1930년대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였다. 1942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여기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덕절마을은 하동정씨 문절공후 유수공 청주파문중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과 정양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정순만(鄭淳萬,1873~1911)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추서. 당대에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던 인물로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물론 망명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한 선구자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를 이끌고 보안회 활동을 주도하며 일제에 맞섰고, 1905년 을사늑약에 분연히 얼어나 반대투쟁을 주도하였다. 고향에서는 문중과 힘을 모아 덕신학교를 세워 청주지역의 근대교육을 선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끼자, 이상설, 이동녕 등 동지와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불디보스토크로 옮긴 후에는 헤이그 특사파견 지원,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창간과 주필 활동, 동의회 참여와 안중근 의거 계획 등 망국을 전후한 시기까지 민족운도사의 중요한 순간에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1911년 연해주 한인사회 분파와 파쟁의 희생양으로 38년의 짧은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쳤으나, 연해주 한인사회의 반성과 단합을 촉구하여 권업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작지않다.
그의 아들 정양필(鄭良弼, 1893~1974)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05년 박용만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고학으로 커니 군사고등학교(Kerney Military Academy)를 졸업하고, 191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른바 한성정부의 평정관에 선임되어 일찍이 독립운동계에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후 미국에 계속 거주하며 유일한과 동업으로 회사를 경영하였고, 1930년대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였다. 1942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정양필의 부인 이화숙(李華淑, 1893~1978),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서울 출생으로 1914년 이화학당을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며 한성정부의 선언서와 공약삼장 발표때 민족대표로 선임되었다. 1920년 대한적십자사회가 설립한 간호원양성소 제1기 졸업생으로서 군자금 모금, 부상자 치료, 간호원 양성에 매진하였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여를 지원하였다.
올해는 정순만이 연해주에서 서거한 지 110주기를 맞이한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서거한 그의 고혼을 달래고자 주민과 기념사업회의 뜻을 모아 분토나마 고향에서 모셔와 추모공원을 조성한다.
'호마의 북풍'의 심정으로 남녘의 고향산천을 그리워했을 선생의 영면을 삼가 기원한다. 아울러 식민지 망국민으로서 디아스포라가 되어 미주에 살다 1997년 대전현충원으로 유해가 봉환된 정양필,이화숙의 민족혼도 함께 기린다.
2021년 6월 18일
올해는 정순만이 연해주에서 서거한 지 110주기를 맞이한다.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서거한 그의 고혼을 달래고자 주민과 기념사업회의 뜻을 모아 분토나마 고향에서 모셔와 추모공원을 조성한다.
'호마의 북풍'의 심정으로 남녘의 고향산천을 그리워했을 선생의 영면을 삼가 기원한다. 아울러 식민지 망국민으로서 디아스포라가 되어 미주에 살다 1997년 대전현충원으로 유해가 봉환된 정양필,이화숙의 민족혼도 함께 기린다.
2021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