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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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2
탐방로그
면과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문중과 주민들의 기억과 문화재수리 기능인의 자문을 받아 주변 옛 건물에서 나온 주춧돌, 기와 등을 활용하여 옛 모습과 똑같이 ㄷ자 한옥으로 지었고, 학생들이 교육을 받던 대청마루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내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40년간 이어온 3.1만세 소리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영향으로 3.1운동 때 덕촌마을 주민들도 일심단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왜경에게 적지 않은 주민들이 체포되었으나 유치장에서도 독립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되새기는 3.1절 기념행사가 1979년부터 덕촌교회와 덕촌신협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덕촌청년회가 마을 전체행사로 이를 계승.발전시켰다. 현재는 덕사모(덕촌을 사모하는 모임)가 행사를 주관하여 윷놀이, 단체줄넘기 등을 즐기는 마을축제로 발전하였다.
110년 만에 복원된 덕신학교
정순만은 상동청년회에서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일제에 대한 실효성 있는 투쟁을 위해서는 국민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결의하고 고향 덕촌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하동정씨문중 어른들에게 근대학교 설립을 발의하였고, 문중의 적극적인 화답으로 종중의 재산과 인물중심으로 1906년 덕신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정순만은 곧바로 망명길에 올라 학교 운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출범초기 덕신학교는 한문위주의 서당체제를 버리고 역사, 지리, 농업 등 근대교과를 교육하였다. 덕신학교는 1919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13년간 운영되었고, 폐교 후 학생들은 1920년 개교한 옥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되었다. 2016년 문중과 주민들의 뜻을 모아 110년 만에 복원되었다. 덕신학교는 도면과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문중과 주민들의 기억과 문화재수리기능인의 자문을 받아 주변 옛 건물에서 나온 주춧돌, 기와 등을 활용하여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름은 응모를 거쳐 덕은재(德隱齋)로 결정하였다.
덕신학교
덕신학교
德隱齋(덕은재)
문절공 영정(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9호)
* 문절공 정수충(1401~1469)은 조선조 세종~예종까지 다섯 임금에 충성을 바치신 조선 초기 충신이다.
* 문절공 정수충선생의 행장에 기록된 계자잠(戒子箴)은 평소 실천하면서 9명의 아들을 가르키며 살아왔던 큰 교훈이다.
[어질게 살고자하면 돈만 알아서는 않되고 돈만 알아서는 어질게 살 수 없다. 돈만 아는 자손은 내가 절대 바라지 않는 바이니 너희들은 깊이 인식하고 인(仁)을 실천할 지어다.]

옥산면의 유래
* 옥산면은 선사시대부터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청주목 서강외이하면 이었으며 2014년 7월 1일부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서 흥덕구 옥산면 43개리를 두고 있다.
* 미호천과 천수천이 흐르고 비닐하우스단지와 낙농이 발달해 농가 소득이 높은 살기좋은 마을이다.
* 1960년대말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면서 오송과학단지와 오송바이오산업단지가 개발되어 생활권이 편리해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자랑스러운 덕촌마을
* 응봉산이 좌우로 마을을 감싸고, 미호천이 흐르고 있으며 어느것하나 빠지지 않아 무학대사가 도읍으로 삼으려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영향으로 근대교육을 일찍이 받아들여 "덕신학교"가 세워지고 다른 마을보다 앞서 독립만세를 외쳤기에 이를 되새기는 삼일절행사가 1970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1909년 세워진 덕촌교회는 마을 발전과 민주화, 농민운동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농촌 교회이다.
* 신협, 낙우회, 덕사모 등이 마을 발전을 이끌고 있다.

덕신학교(옥산초등학교 전신)
* 1950년 을사늑약의 강제로 망국의 위기의식은 치열한 국권회복운동이 봉기하며 사립학교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 귀향한 정순만은 하동정씨 문중대표들과 학교건립을 협의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덕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청주지역 8개의 학교 중 2번째로 큰학교로 1909년 교원 3명 학생수 45명이었고 1916년도에는 85명 학생이 재학.
* 설립 당시 교실은 "강당"이라 불려온 현 건물과 "도사집"(도사공 정지완)을 제2교실로 사용하고 아들 만용의 헌성금이 학교운영에 큰힘을 주었다.
* 현 건물은 역사적인 학교를 복원하자는 의견을 하동정씨 청주종회에 결의하고 201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독립운동가 정순만(1873~1911)
* 정순만은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 간부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고향에서 학교설립을 발의 "덕신학교" 설립에 큰역활을 하였다.
* 국내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동 안중근의사 의거때에는 계획을 주도 안의사 구명 운동에 노력하였다.
소로리 볍씨
* 소로리 볍씨 유적은 1994년 오창 과학산업단지 건설 예정 지역 내 문화유적 지표 조사시 이융조 교수(당시 충북대)팀에 의해 처음 확인되었다.
* 출토된 볍씨는 1만 5천년전 순화 볍씨로 세계 최고 오래된 볍씨이며, 벼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 이곳에서 전 세게로 볍씨가 전파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국제 미작연구소 國際米作硏究所, IRRI에도 소개되었다.
* 청주시에서는 CI를 소로리 볍씨를 형상화하여 제작했고 2016년 12월 소로리 마을 어귀에 소로리볍씨조형물을 세웠다.

충현사
* 옥산면 국사리에 위치한 충현사는 고려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성종 2년에 갑과에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를 거처 하평장사가 되었다.
* 현종 9년(1018) 거란군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때 강민첨 장군과 함께 대파했다. 전쟁사에 빛나는 귀주 대첩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할 때 왕이 직접 마중을 나갔다고 전한다.
* 1967년 추모비를 세우고 사우를 지었다.
역사 속의 태극기
데니 태극기 - 조선왕조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O.N.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
박영효 태극기 - 조선왕조 말엽의 정치가 박영효가 소장했던 태극기
불원복 태극기 - '불원복' 광복이 멀지 않았다는 뜻으로 고광순 의병장이 항일투쟁을 할 때 사용한 태극기
남상락 태극기 -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부인과 함게 만든 태극기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 가늘고 긴 삼각형 형태이 깃발 속에 제작된 태극기로 미국에서 광복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임시의정원 태극기 - 상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렸던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봉준이 부인과 함께 제작한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중경에서 안창호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친필 서명 태극기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1945년 8월 중국 안휘성 정부에서 주최한 연합군 승리 경축시민대회때 광복 축하기념으로 우리 광복군 3지대 2구대 대원에게 만들어 기증한 광복기념 태극기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목판으로 찍어낸 태극기에다 6.25전쟁 때 학도병을 지원한 학생들이 서명한 태극기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 6.25전쟁중인 1950년 10월 초 육군 소위 유관종이 호남지구 진격작전 때 사용한 태극기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남.북의 진군경로 등이 기록되어 있는 특무상사 이철희의 태극기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한국전쟁 당시 경주에서 자원한 학병 19용사 등이 출정 전에 태극기에 각자 소감을 적고 서명한 태극기
애국의 길.애국의 광장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응봉산 위치 - 청주 서쪽에 송골매가 날개를 펴고 있는 봉우리가 있으니 바로 응봉산이다. 북서쪽으로 천안과 경계를 이루는 동림산이 있고 동남쪽에는 부모산이 있으며 앞들에는 미호천이 뒷들에는 병천천이 덕촌을 품으니 안동 하회마을과 같다. 덕촌에는 학문을 소중히 여긴 서촌 마을, 하루 세 번 반성하며 군자답게 살라는 삼성 골이 있다. 그리고 옥산초등학교의 전신인 덕신학교가 있어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뜻을 받들어 전통문화 체험학교로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