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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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재리 산5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鬪爭殉國義士順天朴公號醒石堂諱駿圭遺蹟碑
독립투쟁순국의사 순천박공 호 성석당 휘 준규 유적비
공 성은 박씨요 휘는 준규요 관은 순천이요 호는 성석당이시다. ...중략... 공의 생년은 철종 계해3월 6일이시며 유로부터 천성이 온아하고 자질이 영명하며 의표가 자자하셨다. 그러나 청빈한 가정에 성장하여 일직이 농업에 종사하였기로 문자에는 한숙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충효대가의 후예로 세대 가훈을 받들며 때로는 선생 장자곁에 전립하여 고금제왕 치난과 충신열사에 복절사의 효녀정부에 삼종지의등 사사를 공실히 묻고 익○들어 실천궁행하기에 열중하셨다. 시운이 불행하여 경술국치를 맞나 분개한 심정이 흉중으로부터 뇌두까지 창일하셨다. 그러나 차 소위 일지항○이요 독불장군의 격이다. 다만 배일사상을 흉중에 깊이 간직하고 산중에 은거하여 운중에 밭갈기와 월하에 고기를 낙거 여경을 보내는 중 잔인무도
한 왜적에 가혹한 학정은 일증월가하여 생민에 도탄은 멸말에 부닥쳤다. 천운이 간중하여 기미2월이 닥쳐오자 수도로부터 독립만세가 시작되자 삼천리 강산에 독립만세 함성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이러낫다. 공이 때를 계기로 하여 인근 동지들를 찾아 고취진작을 시키며 3월 1일에 병천시를 이용하여 군중을 규합하고 태극기발아래서 독립만세를 재성고창하며 질서정연이 왜적 분견소를 향하고 돌진하였다. 헌병소장은 사태가 급박함을 보고 천안본소로 응원을 받아 왜병이 두대의 차로 나려와 무자비하게 군중앞에 총을 난발하여 군중은 혼불부분하고 당황히 우왕좌왕하던 가운대 공은 언색을 불변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적은 공의 면전에 육박하였다. 공은 적수공권으로 적과 충동하자 적의 흉봉은 공의 복부를 처 오장이 탈출하고 흉탄은 융배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공은 만세를 생명이 다랄때까지 구불정성하시다가 인하야 장열한 순절을 하셨다. 슬프다 여자신도 현장에서 처절한 광경을 목시하고 공을 위하여 애도의 경의를 표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신후 28년 을유에 해방이 되어 독립의 기발이 날리였다. 공의 장손 만순과 족손 창순보가 공에 위대한 공적이 연몰무전함을 원통이 역여 진정서를 중앙청 총부처와 문교부에 상정하여 애원이 호소하였다. 총무처는 사실을 심사위원회에 회부하여 엄밀한 심사를 거듭하여 실적이 뚜렷이 드러나자 인하여 공에 고귀한 이름을 순국선열 사책에 같이 올리고 춘추기념식전에 향화를 누리게 되셨으니 어찌 만순에 근천지요화 창순보에 주선한 성력이 아니리오. 공의 묘소는 성재리 안령산 계좌원이며 부인 수성최씨는 공묘에 합폄하였다.
...후략...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재리 산 55 애국지사 박준규 선생 유적비를 찾았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차로 포장로를 따라올라가자 비포장이 나오고 걸어서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정상에 오르자 유적비가 보였다.
獨立鬪爭殉國義士順天朴公號醒石堂諱駿圭遺蹟碑(독립투쟁순국의사 순천박공 호 성석당 휘 준규 유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