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수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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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산21-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육군대위의 묘와 입구의 중간쯤에 들어가니 찾을 수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묘소의 흔적과 매우 큰 비석이 보였다. 차에 가지고 다니던 낫을 가져다가 촬영을 위해서 우거져있던 나뭇가지들을 정리했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벌판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난과 역경과 형극의 길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쳐 역사상에 큰 자취를 남긴 애국지사가 있으니 이는 중산 최명수 선생이시다. 일찌기 고종 18년 1881년 청원 대율리에서 최병옥의 3남으로 태어나니 자는 장보 호는 중산 본관은 전주이며 명문출신으로서 영의정 지천 최명길 선생의 11세손이다. 한말의 국운이 어지러워지매 뜻한 바 있어 기독교에 입교하여 1907년 목천 장로교회의 창립 전도사로 선교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눈을 뜨고 청년강습소를 열어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유석 조병옥 선생과 같은 인재도 길러냈다. 이해 정미 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운이 극도로 악화되어 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통분을 품고 독립운동에 뜻을 세워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광복운동을 위한 파란많은 망명생활은 남만주를 무대로 시작되었으니 1914년 요령성 류하현, 삼원보를 중심으로 김동삼 선생 등 70여명의 동지들과 경학사의 정신을 계승한 교포들의 자치기관으로 공리회를 조직하고 사판의 직책을 맡
아 교민간의 풍기와 쟁소문제 등 시비를 공정하게 판정하여 명판관으로 추앙을 받았다. 또한 성재 이시영 선생과 신흥무관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우려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1914년 7월 재만 동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의 통동단총으로 임명되어 통화현 동부지역의 책임을 맡아 교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동분서주 활약하였다. 그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확충 개편되니 선생은 검무감으로 피선되어 교민간에 일어나는 쟁론과 소송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다. 3.1운동 이후 남만주 각지에 산재한 자치기관이 단합의 필요를 느껴 1919년 4월 부민회를 개편하여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하고 교포들의 자치기관으로 한족회를 발족하니 선생은 그 검찰부장으로 피선되어 교포사회의 질서 유지에 주력하였다. 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그 통할 아래 들어가게 되어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니 선생은 중앙의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우렸다. 1919년 6월 임시정부의 대의원이 되었고 1920년 이후는 독립투사의 유족을 구출하는 총책임자로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 1923년 피검되어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겪으셨다. 출옥 후 1925년 1월 만주로 돌아와 통합된 독립운동 단체로 발족한 정의부의 검무감으로 임명되어 교민의 사법행정에 공헌하였다. 1928년 7월 선생은 길림성을 중심으로 반일구국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동포들의 생계를 위하여 미개지를 개척하고 농장을 경영하였으며 임시정부 재정조성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선생은 반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937년 재차 일본 헌병에게 피검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8년간 복역하고 조국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1945년 10월 환국하여 광복군 고문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건국협성회 회장 6월에는 중앙애국노인회 조직부장 10월에는 대동청년단 정치고문 1947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건국사업에 진력하시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특위 충북위원장 1949년 10월 대한민국 감찰위원회 수석위원으로 신정을 바로잡는데 공이 컸다. 1951년 향년 71세로 서거하니 군민장으로 고향땅 대율리에 안장되었고 군민의 이름
중산 최명수 선생 사적비
으로 묘비가 세워졌으며 1977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선생의 슬하의 아들 동훈은 항일 독립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선생은 천품이 강명정직하고 언행일치하는 고결한 인격과 불굴의 강인한 기백으로 독립운동을 영도하고 오로지 국가민족을 위하여 한몸을 바쳤으니 이는 진실로 애국애족의 귀감이 아닐 수 없으며 선생의 숭고한 민족정신은 온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지리라 믿는다. 이제 선생의 묘역을 정화함에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사적을 적어 삼가 이 비를 세운다.

청주교육대학 교수 이종춘 근찬, 종인 최두옥 근서
서기 1984년 갑자 11월 일 중산 선생 묘역정화사업 추진위원회장 최중혁, 청원군수 신양호, 청주원호지청장 조규흥 건립
GPS 상의 주소는 북이면 대율리 산 21-12이다.
왼쪽이 육군대위의 묘가 있는 곳이고, 오른쪽이 최명수 선생의 사적비가 있는 곳이다.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최명수 선생 구 묘역 중산 최명수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최명수 선생의 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지만, 사적비는 아직 묘역에 남아있다고 한다.
대율주유소 사장님이 애국지사의 사적비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서 찾았는데, 휴업일(일요일)이라 사장님께 여쭤볼 수 없었다.
후손되시는 분과 통화를 한 결과 예전 묘소의 위치는 초이가든 뒤쪽 100미터 정도에 왼쪽에 길이 있는 곳에 있다고 해서 우선 찾아보기로 했다.
첫번째 길 끝까지 들어오자 저 너머로 묘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