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43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바로 옆에는 마을자랑비가 있었다.
묵정마을 자랑비
....................................2Km떨어진 '고듸미'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와 영각!....
이 고장출신 역사 인물이 많아 졸제 신식 선생, 하은 신용 선생, 금하 신흥우 박사, 경부 신백우 선생, 신규식 장관이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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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Km떨어진 '고듸미'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와 영각!....
이 고장출신 역사 인물이 많아 졸제 신식 선생, 하은 신용 선생, 금하 신흥우 박사, 경부 신백우 선생, 신규식 장관이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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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신규식 선생과 더불어 산동삼재(山東三才)로 불리는 경부 신백우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사적비가 위치한 정확한 주소는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438-1이다.
사적비가 위치한 정확한 주소는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438-1이다.
경부(畊夫) 신백우 선생은 어려서는 신채호 선생과 함께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그뒤 서울의 측량학교, 외국어학교,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한 뒤 청주 측량학교와 서울 태극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소년(少年)》의 편집과 신민회 및 대동청년단에 관여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는데,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노선에 반대하여 손을 떼었다.
그 뒤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광한단에서 잠시 활약하다가, 1921년에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이어 무산자동지회, 조선노동연맹회, 신사상연구회 또는 화요회, 조선노농총동맹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때의 신백우는 사회주의자이었으므로 1924년 공산주의운동 관계로 붙잡히기도 하였는데, 1925년 출옥한 뒤에는 공산주의계열과 절연하였다.
그 뒤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광한단에서 잠시 활약하다가, 1921년에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이어 무산자동지회, 조선노동연맹회, 신사상연구회 또는 화요회, 조선노농총동맹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때의 신백우는 사회주의자이었으므로 1924년 공산주의운동 관계로 붙잡히기도 하였는데, 1925년 출옥한 뒤에는 공산주의계열과 절연하였다.
경부 신백우 선생 사적비
경부 신백우 선생은 청사에 빛나는 독립투사요 위대한 민족지도자요 민중운동의 선구자이사다. 선생은 1887년 1월삭 1일 여기 청원군 낭성면 묵정에서 부친 병휴선생과 모친 여산 송씨의 장남으로 탄생하시니 문충공 보한재선생의 16대손이시다. 가풍인 충효의 얼을 이어받은 선생은 남달리 총명하여 소년기에 벌써 경사에 달통하셨다. 그러니 일찌기 웅지를 품은 선생은 개화와 신문물에 민하셨으니 약관에 광성측향학교, 한성외국어학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차례로 필업하셨다. 당시의 정국은 일제의 압박이 나날이 심해져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고 국운은 백척간두에 서있었다. 구국일념의 선생은 동지 남형우등과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장래를 맹서하고 다시 신민회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그 서기및 의사원이 되어 기관지 소년의 발행에 참획하셨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국권회복에는 무력양성이 기본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적지로 만주를 택하셨다. 이듬해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이동녕, 이시영, 서세충동지들과 협의하여 양병기지를 유하현등 각지에 성신태를 설치하여 국내동지들과의 연락 교민의 정착등 선동투쟁전선을 형성하셨다. 그무렵 선생은 서세충과 함께 왜적의 괴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교 시찰차 의주에 오는것을 기회로 철퇴를 가할 준비를 하던중 국내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신민회동지가 거의 피검되니 곧 105인 사건이다. 선생은 이동녕, 서세충동지등과 함께 남북만을 순회하면서 독립군양성에 힘쓰는 한편 단재를 당수로 대동청년당을 재조직하고 그와 함께 조선사연구를 위해 고구려의 유적지를 두루살폈으니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이때 골이 잡혔다. 1918년 가족의 환국때문에 일시귀국한 선생은 제1차세계대전후 서울에서 국내독립지사들과 협의하여 선생과 서세충, 신팔균등이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선정되었으나 마침내 3.1운동이 일어나 출발을 중지하고 전국13도 대표로 한성임시정부를 주획하셨다. 그러나 때를
같이하여 상해임시정부가 태동중이라는 소식에 선생은 4월 민강, 김태희등과 상해로가서 그에 참획하는 한편 외교활동과 무력투쟁의 병행을 역설하셨다. 선생은 단재와 함께 대한보를 발행 군사노선을 강조했으나 수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서간도에서 김동삼, 이청천, 신팔균, 김격천등과 제휴하여 서로군정서의 참모주임으로 활약하는한편 합니하(?)에서 재건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법학과 정신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뒤이어 선생은 군정서의 소장파인 이시열, 현정경, 김규환동지등과 군저서별동대 광한단을 조직 직접 무력항쟁에 나서 압록강일대의 일군경을 공격하여 위력을 떨치시었다. 1920년 9월 하순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구실로 아 독립군을 공격해왔다. 이때 선생이 지위한 독립군부대는 선생의 비상한 지모로 일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으니 이것이 곧 선수평전투이며 청산리대첩의 서전이다. 이러한 빛나는공훈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이름은 대개 숨겨졌다. 이는 이범석장군의 말씀처럼 선생은 공을 딴사람에게 돌리거나 익명으로 행도하는것을 원칙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승리는 하면서도 후퇴할수밖에 없던것은 후속부대가 없는 독립군의 숙명이었다. 살길은 입소밖에 없었다.그러나 선생의 신념은 만주에서의 투재이지 입소투쟁이 아니었다. 독립군의 비운을 예견한 선생은 서울로 돌아오셨다. 일찍부터 선생은 노농대중문제에 관심이 깊으셨다. 이들은민족의 절대다수일뿐아니라 일제침략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1921년 3월 선생은 박중등 동지들과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전국 각지를 순회강연하고, 조직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그 기관지 공제의 발행에 참획하셨다. 이와함께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한 소작인조합도 추진하셨다. 노동단체의 조직이 확대되자 ?2년 10월 이미 조직돼있던 무산자동지회와 함하여 조선노농연맹회를 조직하였고 한편 홍명희, 윤덕병등과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도 조직하셨다. 운동과 조직이 확대가 거듭되자 4년에는 전국 88개 노농단체대표를 모아 다시 조선노농총동맹을 창립하셨다. 그러나 운동의 기관지인 공제 신생활동등이 일제의 탄압으로 연이어 취소되니 그 기능은 거의 ??되었다. 이에 대한 투쟁을 공감한 선생은 여러 언론인과 협의하여 언론인투쟁단체 무명회를 조직 그간사로 활약하셨다. 그러나 가중되는 탄압속에서 일제의 투쟁함에는 보다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각 언론사회단체대표들과의 협의하여 4년 6월 언론집회압박탄핵회를 결성하고 선생은 안재홍, 김병로등과 그 실행위원이 되어 투쟁에 앞장스셨다. 이무렵 선생은 조선일보의 초빙으로 동사 고문겸 사설기자로 활약하셨으며 선생의 보천교성대문으로 친일에 광분하던 그 수가 붕괴된것도 이때의 일이며 또 우리나라 최초로 근로자무료숙박소를 인사동에 만들어 노동자의 복지에 착수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거라. 선생은 그해 10월 코민테른 극동지역 조선지구 대표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다음해 6월 보석 7월에 면소되었으나 이때문에 요시찰로 10년의 행동제한을 당하셨다. 연금생활중에 선생은 홍명희를 통하여 박헌영등으로부터 누차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종용받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셨다. 향리에세 선생은 종문의 여러 문물을 새시대에 맞도록 개혁하셨으며 공익조합 산동보통학교등 지역발전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으셨다. 비록 행동이 부자유한 속에서도 형편의 최상한으로 애국애족을 위한 개혁과 자주독립의 노력을 경주해마지않음은 선생의 인품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선생을 더욱 괴롭힌것은 혈맹의 동지요 죽마의 고우이던 단재가 연순에서 옥사하고 그 유해를
그러나 선생을 더욱 괴롭힌것은 혈맹의 동지요 죽마의 고우이던 단재가 연순에서 옥사하고 그 유해를
고디미 옛터에 안장해야만 했던 일이다. 선생은 그를 추모하여 단재계 단재학사 사당을 만들고 전집 출판전 계획도 추진하셨다. 1945년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할 겨를도 없이 모정삼상회의는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선생은 결연히 일어나 반탁투쟁에 앞장서 그??에 일약을 담당하셨다. 신생??건립하려면 정직한 정치노력의 형성이 절심함을 느낀 선생은 이극로, 홍명희, 안재홍등과 1947년2월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하였으나 극좌??의 ?치속에??6개월만에 해산되고말았다. 선생은 만년에도 애국애족의 일환으로 대종교유경의 음역과 독립운동사의 편찬을 추진하시면서 온 생..염려하시다가 1961년 1월 5일 75세를 일기로 향리에서 여면하셨다. 부인은 명벌인 진주유씨이며 ?고한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