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취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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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 산20-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 69-1 화림사 뒤편 가산(家山)에 있다는 애국지사 환성 어취선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고있다.
그런데 화림사를 가는데도 사찰 이름 안내판도 없고, 네비게이터는 오른쪽 없는길을 안내하는 등 쉽지가 않다.
어취선 선생의 묘소를 찾아나섰다. 화림사 주변을 위성사진을 보면서 묘소가 보이는 곳을 다 찾아볼 예정이다. 화림사 입구에 있는 화림선원 뒤편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는 김씨 성씨의 묘소였다.
두 번째 묘소는 예전에 묘소가 있었지만 이장된 상태의 묘소 터였다.
산 정상 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더 올라가니 많은 묘소들이 보였다. 혹시 함종어씨 집안의 묘소가 아니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입구의 묘소가 金氏 성씨여서 걱정을 했는데, 咸從魚氏 집안의 묘소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위쪽으로도 묘소들이 많았다.
저 멀리 애국지사 어취선 선생의 묘비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愛國志士 喚醒魚聚善先生配孺人光山盧氏之墓
애국지사 환성 어휘선선생 배 유인 광산노씨 지묘
愛國志士 喚醒魚聚善先生配孺人光山盧氏之墓
애국지사 환성 어휘선선생 배 유인 광산노씨 지묘
선생의 휘는 취선(聚善) 자는 승여(升汝) 호는 환성(喚醒)으로 1807년 11월 22일 출생하셨다. 본관은 함종(咸從)으로 호장동정(戶長同正) 化仁(화인)의 28대 문정공(文正公) 세겸(世謙)의 16대손이다. 祖考(조고) 俊遇(준우)께서는 允綽(윤작) 允績(윤적) 允弼(윤필) 允譯(윤역)을 두었고 允綽(윤작)께서는 綾城具氏(능성구씨) 사이에서 聚善(취선) 最善(최선) 敎善(교선) 用善(용선)을 두었으며 선생은 백부 允綽(윤작)에게 出系(출계)하셨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고 실천한 참 선비셨고 조국 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하시다 서거하신 민족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7세에 白首文(백수문) 학습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통감 사략 11세에는 四書三經(사서삼경)을 한 해에 畢(필)한 신동으로 대학자인 生父(생부) 允績(윤적)에게서 家學(가학)을 전수 받아 학문의 기틀을 닦고 當代(당대) 儒宗(유종)인 省齋(성재) 柳重敎(유중교) 門下(문하)에서 수학하셨다. 선생께서 斯文(사문)의 宗匠(종장)으로
선생의 휘는 취선(聚善) 자는 승여(升汝) 호는 환성(喚醒)으로 1807년 11월 22일 출생하셨다. 본관은 함종(咸從)으로 호장동정(戶長同正) 化仁(화인)의 28대 문정공(文正公) 세겸(世謙)의 16대손이다. 祖考(조고) 俊遇(준우)께서는 允綽(윤작) 允績(윤적) 允弼(윤필) 允譯(윤역)을 두었고 允綽(윤작)께서는 綾城具氏(능성구씨) 사이에서 聚善(취선) 最善(최선) 敎善(교선) 用善(용선)을 두었으며 선생은 백부 允綽(윤작)에게 出系(출계)하셨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고 실천한 참 선비셨고 조국 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하시다 서거하신 민족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7세에 白首文(백수문) 학습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통감 사략 11세에는 四書三經(사서삼경)을 한 해에 畢(필)한 신동으로 대학자인 生父(생부) 允績(윤적)에게서 家學(가학)을 전수 받아 학문의 기틀을 닦고 當代(당대) 儒宗(유종)인 省齋(성재) 柳重敎(유중교) 門下(문하)에서 수학하셨다. 선생께서 斯文(사문)의 宗匠(종장)으로
서 명성이 높아지자 도호의숙(桃湖義塾) 등 각지에서 선생을 초빙하고자 했고 문하생이 되고자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일제가 을미년(1895)에 명성황후 시해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단발령과 服制(복제) 개혁 등 전통체제를 파괴시키자 이에 격분한 제천지역 儒林(유림)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倡義(창의)하였으며 선생의 從叔(종숙) 允奭(윤석)께서는 아들 경선 중선과 함께 의병에 동참하여 군자금 헌납과 義陣(의진)을 지휘하셨다. 한편 선생은 을미의병 당시 유홍석 義陣(의진)의 군자금 모금에 참여하였고 직접 의병에 동참하고자 毅菴(의암)에게 가던 중 의병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되돌아갔다. 1905년 정월에 의암과 면암 최익현을 배알하여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강년 김상태 이소응 의병장 등과 장차 의병 활동의 방향과 시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庚戌國恥(경술국치)가 있던 해 선생은 '왜적의 종이 될 수 없다'며 의암을 비롯한 의병 가족 45가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1911년 2월 14일) 중국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하여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선생은 평생 衛正斥邪(위정척사)에 앞장서서 홀로 어려운 역경 속에서 斯文(사문)을 지키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많은 애국지사들과 交遊(교유)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血誠(혈성)을 다하셨으나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亡命(망명) 26년이 되는 1936년 5월 3일 이국땅에서 恨(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선생은 配位(배위) 光山盧氏(광산노씨)와 慶州李氏(경주이씨) 사이에서 孫(손)이 없어 姪子(질자) 泳德(영덕)으로 系(계)를 이었다. 泳德(영덕)은 1남2녀(범수 임수 영이)를 두었고 손 범수는 1남5녀(경택 경순 경숙 경임 경란 인성)를 두었으며 증손 경택은 남매(진규 자혜)를 두었다. 후손들이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모두가 명문가 후예답게 촉망받는 인재들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은 선생의 蔭德(음덕)으로 인한 것이다. 묘소는 중국 봉천성 본계현 성창황가보자(城廠黃家堡子) 구룡산(九龍
서 명성이 높아지자 도호의숙(桃湖義塾) 등 각지에서 선생을 초빙하고자 했고 문하생이 되고자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일제가 을미년(1895)에 명성황후 시해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단발령과 服制(복제) 개혁 등 전통체제를 파괴시키자 이에 격분한 제천지역 儒林(유림)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倡義(창의)하였으며 선생의 從叔(종숙) 允奭(윤석)께서는 아들 경선 중선과 함께 의병에 동참하여 군자금 헌납과 義陣(의진)을 지휘하셨다. 한편 선생은 을미의병 당시 유홍석 義陣(의진)의 군자금 모금에 참여하였고 직접 의병에 동참하고자 毅菴(의암)에게 가던 중 의병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되돌아갔다. 1905년 정월에 의암과 면암 최익현을 배알하여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강년 김상태 이소응 의병장 등과 장차 의병 활동의 방향과 시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庚戌國恥(경술국치)가 있던 해 선생은 '왜적의 종이 될 수 없다'며 의암을 비롯한 의병 가족 45가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1911년 2월 14일) 중국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하여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선생은 평생 衛正斥邪(위정척사)에 앞장서서 홀로 어려운 역경 속에서 斯文(사문)을 지키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많은 애국지사들과 交遊(교유)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血誠(혈성)을 다하셨으나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亡命(망명) 26년이 되는 1936년 5월 3일 이국땅에서 恨(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선생은 配位(배위) 光山盧氏(광산노씨)와 慶州李氏(경주이씨) 사이에서 孫(손)이 없어 姪子(질자) 泳德(영덕)으로 系(계)를 이었다. 泳德(영덕)은 1남2녀(범수 임수 영이)를 두었고 손 범수는 1남5녀(경택 경순 경숙 경임 경란 인성)를 두었으며 증손 경택은 남매(진규 자혜)를 두었다. 후손들이 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모두가 명문가 후예답게 촉망받는 인재들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은 선생의 蔭德(음덕)으로 인한 것이다. 묘소는 중국 봉천성 본계현 성창황가보자(城廠黃家堡子) 구룡산(九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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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자락에 있고 이곳에는 配位(배위) 光山盧氏(광산노씨) 옆에 魂(혼)을 모셨으며 配位(배위) 慶州李氏(경주이씨)는 20여 보 아래에 있다. 국가에서는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2014년 3월 1일)을 수여하였다. 아! 선생의 듯과 발자취를 생각함에 후손으로서 뜨거운 흠모의 정이 용솟음친다.
단기 4347년(2014년) 11월 14일
증손 경택(증손부 박금순) 현손 진규 자혜가 비를 세우다
3종손 오암 임수 글을 짓고 여란 왕명숙 제자를 쓰다
山) 자락에 있고 이곳에는 配位(배위) 光山盧氏(광산노씨) 옆에 魂(혼)을 모셨으며 配位(배위) 慶州李氏(경주이씨)는 20여 보 아래에 있다. 국가에서는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2014년 3월 1일)을 수여하였다. 아! 선생의 듯과 발자취를 생각함에 후손으로서 뜨거운 흠모의 정이 용솟음친다.
단기 4347년(2014년) 11월 14일
증손 경택(증손부 박금순) 현손 진규 자혜가 비를 세우다
3종손 오암 임수 글을 짓고 여란 왕명숙 제자를 쓰다
묘비에 배위 전주이씨께서는 20여 보 아래에 있다고 되어있다.
오른쪽은 다른 분의 묘소였다.
배위 경주이씨의 묘소이었다.
孺人慶州李氏之墓(유인 경주이씨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