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명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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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515-6
탐방로그
본 비는 진천군 초평붕어마을에서 한반도 지형 전망공원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軍資監正 林秀蓂公 懿蹟碑(군자감정 임수명공 의적비)
軍資監正 林秀蓂公 懿蹟碑(군자감정 임수명공 의적비)
상산 옛고을 구곡땅 세금천의 맑은 정기를 타고 충효로 일세의 본이 되신 분이 있으니 그는 상산인 임수명 공이시다.
공은 고장의 명문으로 고려 안사공신 흥화부원군 상산백 휘 희의 후손이요. 고려명장 위사공신인 장령공 휘 연의 14세손이며 금자광록대부 예문춘추관 대제학 상산군 휘 지의 9세손이요. 병조참판 휘 경문의 고손이며 사복 검정 휘 격의 증손이요. 현감 휘 윤종의 손이며 부사직 휘 춘의 아들로 빛나는 가문에 태어나 품기 탁월하
고 부재영민하여 불구문달하였으며 스스로 바른 예절을 행하여 효순성경하였다. 선조 임진왜란에 공의 백형 수전은 의병을 일으켜 죽산 봉성에서 왜적과 일대격전을 감행하여 용전하였으나 병고시진하여 마침내 장렬하게 순국하니 후에 형조참의에 증직되고 명정되어 충신 정려문이 세워져 오늘에 전한다. 그런데 정유재란으로 왜구가 다시 침범하자 안성사인 홍계남이 창의하여 의병을 영솔하고 진천 현탄령에 내둔함이 공은 국운이 위급함을 좌시할 수 없어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계남의 의병과 합세하여 북상하는 왜적을 막아 싸워 물리쳐 기호지방의 안정을 이룩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은 선전관에 제수되고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공은 또한 효성이 극진하여 조석지공과 정성지절로 효도를 다하여 형제우애하고 친족이 화목하니 이 어찌 충효양전한 희대의 순풍미거가 아니리요. 공은 배 한양 조씨 사이에 3남을 두시니 장자 재는 현감이요. 차남 찬은 통덕랑이고 3남 빈은 증 판결사이며 현손 봉서는 훈련판관이니 영조 무신란에 공을 세워 특사 녹권하고 왕이 친히 치하하며 손을 어루만지니 황공하여 종신토록 그 손을 금포로 싸매고 감격하여 마지 않았다 한다. 문중에 자손이 번창하고 효절이 속출하니 가히 충효지문이라 원근 종족이 봉선 추모의 뜻을
이기지 못하여 건비 기적함에 선조의 어질고 두터우신 언행과 뜻을 길이 후손에 잇고자 공의 의적을 적을 적어 뒷날에 전한다.
1980년 경신 4월 일 양성인 이종춘 짓고 족손 상훈 쓰다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515-6 초평붕어마을 한반도 지형 전망공원 가는 길 임수명공 의적비를 찾아왔다.
인터넷에 신팔균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의 부인이신 임수명(任壽命) 애국지사의 사적으로 소개되어 있어서 찾은 것이다.
현장에 와서보니 비문에는 임수명(林秀蓂)으로 애국지사 임수명(任壽命)지사와 한자도 다르고,비문을 읽어보니 임진왜란시 공신이었다.
임수명의 이름으로 두 분이 계신다. 신팔균애의 부인이신 임수명(任壽命)지사와 임병찬의병장의 손자이신 임수명(林守明)지사이시다.

임수명(任壽命)은 충북 진천(鎭川) 사람이다. 1912년 서울 모(某)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申八均 ; 통의부군사위원장겸 사령관)과 알게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8월 1일(음) 신팔균이 통의부(統義府)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하는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鐘路區社稷洞)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임수명(林守明)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조부 임병찬(林秉瓚)이 1913년 9월 서울에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붙잡혀 1914년 거문도(巨文道 : 전남 여주군 삼산면)로 유배(流配)되자 조부를 수행하여 1916년 임병찬이 객사순국(客死殉國)할 때 까지, 2년간에 걸쳐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8월 전 협(全協)·이일영(李一榮)·윤용주(尹龍周) 등이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할 때 부친 임응철(林應喆)('90년, 애족장 추서)과 함께 입단하였다. 그는 동단에서 전라도 익산군(益山郡) 이사(理事)로 임명되어 동지규합(同志糾合)과 군자금모집을 담당, 임병대(林炳大)·김흥순(金興順)·이병호(李炳祜) 등에게 대동단 입단을 권유하여 가입케하고 김흥순으로부터 군자금으로 60원(圓)을, 이병호로부터 70원을 받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부친 임응철(林應喆)을 통하여 대동단본부원 윤용주에게 납부케 하였으며, 김흥순을 전주군이사(全州郡理事)로 발령케 하는 등 활동하다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0년 2월 2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控訴)로 1920년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어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