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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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191-2
탐방로그
본 비는 진천의 포석문학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포석 조명희 문학비
포석 조명희 문학비

경이(驚異)

어머니 좀 들어 주서요
저 황혼의 이야기를
숲 사이에 어둠이 엿보아 들고
개천 물소리는 더 한층 가늘어졌나이다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어머니 좀 들어주서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서요
저 담 아래 밤나무에
아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
등불을 켜 가지고 오서요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 가십시다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抱石 趙明熙)
선생은 1894년 8월 10일 이 곳 충북 진천군 벽암리 수암 부락에서 태어나셨다. 중앙고와 일본 동경 동양대 동양철학과에서 공부한 후 27세부터 민족 극 운동을 펼치셨으니 29세 때(1923) 펴낸 '김영일의 사(死)'는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희곡집이요, 이듬해 펴낸 시집 '봄 잔디밧 위에'는 한국최초의 개인 창작 시집이다. 31세 때 '파크' 결성에 참여했고 33세인 1927년에 민족민중문학의 기념비적인 단편소설 '낙동강'을 발표하셨다. 이듬해인 소설집 '낙동강'을 펴내신 후 러시아로 망명해 조선사범대 교수로 활동하시며 후학을 기르고 이때 쓴 저항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시는 등 그 곳 한인 사회에 우리문학의 씨를 뿌리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탄압정책으로 KGB에 체포돼 이듬해인 1938년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하셨으니 선생의 나이 44세였다. 근.현대 한국문학사에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남긴 선생의 선구적인 작품들을 남과 북에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추앙되는 고전이 되어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으며 한국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이제 통일시대문학의 디딤돌이 되어 있으니 여기 그 큰 이름을 새겨 그린다.
포석 조명희 문학제 10주년을 기념하여 진천국 진천문화원 포석회 동양일보의 뜻에 따라 진천후학 정창훈의 조각과 염정모의 글씨로 세워지다. 2003년 10월
포석문학공원은 GPS 주소 전천군 진천읍 벽암리 191-2에서 찾을 수 있었다.
포석문학공원(抱石文學公園)
포석의 길
포석 선생 탄신 110주년을 맞아 11회 포석 조명희 문화제에서 세워지다
2004년 10월 20일 포석회
포석문학공원(抱石文學公園)
포석(抱石)문학공원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주실 수 없을까
- 조명희(봄 잔디밭 위에) -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포석 조명희 선생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민족 민중,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진천 문학 발전의 반석으로 삼고자 정성으로 이 공원을 조성하다.
애국지사 서훈을 2019년에 받으셨기 때문에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