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팔균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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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667
탐방로그
본 비가 위치한 이월초등학교의 전신인 보명학당은 신팔균 장군이 직접 설립한 학교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 이월면 노은실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이월국민학교 전신인 사립 보명학당을 설립하였고 그 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경술국치(1910)로 조국이 비운을 맞게 됨에 비분강개하여 이듬해 신유년에 만조로 망명하였다. 시베리아 북경 상해를 전전하면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이지영 조소앙 조성환지사 만나 구국의 방략을 손하다가 대동청년당의 일원으로 신백우 서세충 지사의 파리강화회담에 파견되었다. 장군의 항일 투쟁은 곳곳마다 선봉이었고 활약상은 항상 뛰어났으니 서로군정서와 신흥부관학교의 교관 역임은 물론이요 대한통의부의 의용군사령장과 군사원장을 겸임하였다. 대소 수십차의 전투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전과가 혁혁하니 세상에는 장군을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의 삼천(3天)이라 불렀다. 그러던중 갑자년(1924) 6월 1일 봉천성 흥경현 이도구에서 사관들의 야외조련을 지휘하다가 홀연히 마적으로 가장한 왜적의 습격을 받고 순국하니 향년 42세였다. 초배 광산 김씨는 20대에 졸했고 후배 풍천 임수명여사는 독립군의 뒷바라지에 진력하다 출산을 위해 귀국하여 한성 사직동에 거주하던중 장군의 순국비보를 듣고 갑자(1924) 10월 4일 유복녀 계영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장군의 장남 현충은 중국 산서성 북방군관학교 재학중 독립군에 종군하다가 경오(1930) 7월 7일 비분하여 자결하였고 차남 현철은 경신년(1980) 3월 16일에 졸했고 3남 현택은 생존하고 있다. 장군의 손으로는 현충의 계자 범호와 현철의 자 제영과 현택의 자 지여과 윤이 있다.
장군이 순국하신지 70성상만에 친히 육영의 꿈을 심던 이 장소에 오정환을 위시한 유지가 장군의 위대한 삶을 길이 추모하고 자 이 비를 세우다.
계유년(서기 1993년) 10월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667 이월초등학교 내 동천 신팔균 장군 사적비를 찾아왔다.
신팔균 장군의 사적비가 이곳에 있는 것은 같은 면 출신의 애국지사이기 때문인줄 알고 왔었다.
하지만 사적비문을 통해서 이 이월초등학교의 전신인 보명학당이 신팔균 장군이 직접 설립한 학교였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대한 통의부 의용군사령장 군사위원장 동천 신팔균 장군 사적비
동천 신팔균장군은 한민족이 일본침략자로 부터 시련을 강요당할때 오직 대한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장군의 호는 팔균이요 자는 윤수이며 호는 동천이니 평산인이다.고려 개국원훈태사장절공 휘숭겸의 31대손이요 조선세종의 조정에 배향된 좌의정 문희공 휘 양의 17대손이다. 또한 선조의 호성공신인 보국평천부원군 증 영의정 충헌공 휘 잡의 12대손이요 순조조의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 증 좌찬성 위 홍주의 현손이다. 통정대부사 증 좌찬성 휘 의직은 장군의 증조가 되고 보국판중추부사장숙공 휘 헌은 조가 된다. 이처럼 장군의 가계가 세세토록 구국의 간성이었으니 살신보국한 장군의 충절이 어찌 우연이리오. 장군은 고종 임오년(1882) 5월 19일 경제에서 한성부 판윤 휘 석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노은실 강당에서 수학한후 구국의 뜻을 품고 무관학교를 필했다. 육군정위로 근무중 정미년(1907)에 일본이 대한군대를 해산함에 장군은 울분을 삼키며 진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