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항일의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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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547-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지는 햇빛을 피해서 촬영하기가 쉽지않다.
의병장 청암 한봉수공 항일의거비
한말풍설속에 친일파의 준동으로 왜병이 침략의 독아를 뻗칠무렵 고종21년 갑신 4월 18일 청주군 북일면 세교에서 탄생하신분이 계시니 유격대명장 한봉수공이시다. 소년시절부터 정의앞에는 분연히 약기했고 불의앞에는 추호도 굴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항일운동이 삼천리방방곡곡에서 봉기할때 공도 결의한바있어 왜병의 압력으로 한국군대가 강제해산된 익년인 1907년 드디어 의거의 횄불을 들었다. 청주 세교에서 해산군인 10명과 죽엄을 각오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그 발상지가 진천군 문백면이다. 단신으로 도하리를 지날때 진천으로 향하는 일본헌병기병대를 발견했다. 때는 동년 5월
26일 정오경. 비호같이 날랜 공은 지름길로 달려간곳이 봉죽리 석벌부락 운시간에 들에서 일하던 이흥직씨의 지개를 지고 박병화씨의 옷으로 농부를 가장하였다. 지개옆에 총을 숨기고 바위백이보리옆에서 태연하게 서있었으니 왜헌인들 무었을 의심하였으리오. 공은 왜병에게 항거하고 나라를 위하여 생명도 홍모의 가벼움에 붙였으니 무었이 두려우랴. 島峙喜治(시마자키겐지)상등병은 부하헌병2명 인솔하 의기양양 말발굽소리 요란스럽게 달리던 찰나 총성이 터졌다. 말이 현장에서 폐사한다. 다시 총성이 터지자 시마자키겐지(島峙喜治)가 즉사한다. 다시 총성이 터진다. 헌병 2명은 혼비백산 총조차 진흙논에 밟아버리고 정신없이 보리밭으로 사라졌다. 숨을곳을 향하여 수발의 총성이 울렸다. 처음으로 개가를 올린 공은 계산리산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용후 공은 호서일경과 경기일각에서 닫는곳마다 전승의 용명을 날렸고 문경전투를 최후로 전후 3년간 33전1패의 의전은 끝났다. 이순불리를 통한한 공은 망명도중 서울역에서 왜경에게 잡히어 사형선고를 밨았으나 합방의 대사로 방면되었고 3.1운동당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2년반의 영어생활을 겪었다. 해방후 계유 3.1절에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았으며 1972년 12월 25일에 영면하셨다. 왜병들은 공의 비호같이 날래고 대담부쌍한 작전앞에 벌벌떨었고 공의 신출귀몰한 전술앞에 무릎을 꿀었다. 여기는 시마자키(島峙)비가 섰던자리 죽은 말을 바위백이에 묻었기 바위백이 말무덤이라고 전하는 곳. 이제 이 자리에 공의 위훈을 추모하고자 문백내 유지발기하여 입비건립위원회에서
문백면민으로부터 모금한 성금과 정종택 지사, 한성동 군수의 적극적인 성원으로 비를 세워 공의 의적을 찬양하는 바이다. 수많은 왜병을 무찔러 숭고한 호국정신을 발휘했고 풍찬노숙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우국애정으로 구국운동에 앞장슨 공. 이제 공은 가셨지마는 그 위대한 업적은 불후의 영명으로 후세의 귀감으로 영세무궁토록 혁혁하게 빛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