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을미의병 창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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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79-3
탐방로그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79-3 분수공원 내에 영월을미의병창의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빗돌 글: 엄흥용, 빗돌 글씨: 주명섭, 조각: 박찬갑
2018년 3월 1일 영월문화원
세움 : 영월군수 박선규, 영월군의회의장 엄승렬, 춘천문화원장 류종수, 영월문화원장 엄흥용
도움 : 춘천시장 최동용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79-3 분수공원 내에 영월을미의병창의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아왔다.
寧越乙未義兵將倡義碑(영월을미의병창의비)
寧越乙未義兵將倡義碑(영월을미의병창의비)
寧越乙未義兵將倡義碑(영월을미의병창의비)
영월의병항쟁약사

영월은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 선생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영월을미의병창의지(寧越乙未義兵將倡義地)이다. 19세기 말 일제는 국권 찬탈을 목적으로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반포하였다. 이때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실천하고자 했던 의병들은 영월에서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류인석은 1895년 12월 24일 영월 관아 문루(門樓)에 복수보형(復讐保形)이란 깃발을 내걸고 영월 을미의병 창의대장(寧越乙未義兵將倡義大將)이 되었다. 의암은 대장소를 설치하여 군례를 행하고 군사를 사열했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였다. 그리고 영월의 병진을 구성하고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지어 전국 모든 백성들의 항전을 촉구하였다. 의암의 영월 을미의병은 12월 27일 영월을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제천에 도착해서 의진을 확대 개
편하여 호좌의진(湖左義陣)이라 하였다.

류인석의 호좌의진은 친일파인 단양군수 권숙(權潚),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평창군수 엄문환(嚴文煥)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그리고 1896년 1월 5일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붙잡아 성문 밖에서 참수하였다.

1905년 삼계(三戒) 원용팔 의병장은 영월 주천(酒泉)에서 영월 주천 을사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영월의 정대억(丁大億), 엄성하(嚴聖河), 엄기섭(嚴基燮) 등이 참모종사(參謀從事)로 참여하였다.

특히 영월 장릉 보덕사(報德寺) 승려 김상의(金尙儀)가 승장(僧將)이 되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대한 의병들은 영월 주천으로 집결하여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운강은 주천강에 돌단을 쌓고 영월 주천 정미의병을 창의하여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운강 의병진의 중군장(中軍將)인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는 영월 덕포리 독산(여우고개) 전투 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강년이 청풍 작성전투에서 피체된 후, 김상태는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이 되어 소백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한 기습 작전을 펴 일본 수비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외에도 무릉도원면 아랫골에 살던 윤기영(尹基永) 의병장, 주천면 금마리의 김태원(金泰元) 의병장 등 애국 애족했던 선열들의 발자취가 영월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 고장은 구국(求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간 항일 의병장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草芥) 같이 바쳤으며, 민족의 자긍심을 지켜온 애국 지사들이다. 이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 분들의 숭고한 뜻을 역사에 길이 빛내고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영월을미의병창의비(寧越乙未義兵將倡義碑)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