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산55-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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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증평에 위치한 임창무의 비이다.
같은 장소에 임창무의 묘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예비군 사격장 앞에서 묘소 안내판을 만났다. 길이 좋지 않아서 차를 이곳에 두고 걸어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오른쪽이 예비군 사격장들어가는 길이고, 묘소는 왼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 300m 임창무 묘
← 300m 임창무 묘
올라가다가 또 갈림길이 나왔지만 묘소 안내판이 있어서 다행이다.
임창무 묘 50m→
건너편에 보이는 벌판이 예비군 사격장이다. 사선과 표적의 중간쯤이었다.
聖徒 林公 昌茂 之墓(성도 임공 창무 지묘)
愛國志士 林昌茂 先生 功蹟碑(애국지사 임창무 선생 공적비)
愛國志士 林昌茂 先生 功蹟碑(애국지사 임창무 선생 공적비)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애국지사 임공의 휘는 창무이시다. 공은 평택 형업(충효공)의 제11대손으로 서기 1893년 11월 6일 명서공과 비 수원백씨 사이에 독자로 충청남도 천원군 병천면 병천리에서 탄생하시었다. 천성이 인후독실하시면서 인품이 청수서아하시었던 공은 청주공립농업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시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면서 기독교 신자로서 전라남도 광주 신흥학교 교사로 부임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시다가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보통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기시었다. 공은 경술국치의 애국충정
으로 조국독립의 항일정신을 갈렬하게 불태우고 있던 중 당년 26세되던 해 기미 3.1 만세독립운동이 삼천리 근역 방방곡곡을 진동시킴을 보시고 의거의 결행을 결심하시었다. 즉 1919년 4월 4일 일본인교장과 수석훈도가 출장간 것을 기회로 만경보통학교 4년생인 오연길 이형재 이승필 서봉원 장태석 김형태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명하고 전교생을 교정에 집합케 한 후 오늘은 만경장날이니 모두 장터로 나가 장터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하시고 공이 직접 선두에 나아가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시며 조선독립만세를 드높이 외치시니 학생과 군중이 하나가 되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기세충천한 만세소리는 왜경을 혼비백산케 하였다. 공은 바로 학생대표 6명과 함께 체포되어 동년 5월 14일 군산지청법정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공은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동년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 상고하여 형기를 2년으로 감형하였다. 그 후 재차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원심대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시었다. 공은 그후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증평리 925번지로 귀향하시어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뜻을 모으시다가 옥중 고문과 악형으로 인한 병으로 조국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17일 향년 52세를 일기로 소천하시니 오호통재라!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심신을 바처오신 공은 광복의 영광을 못 보시고 가시니 가신 님의 혼백을 영녕시킬 수 없음이 한스럽도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의 위업을 인정하여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유 자손으로는 비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사자로 원의 형의 이의 찬의 송의가 있고 종손으로 진영이가 있다. 이제 공의 위거와 혁혁한 공훈을 영구히 기리고 세인과 후학의 귀감으로 삼고저 이 비문을 남기다.
서기 1992년 3월 일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박세원 근찬
전주후인 이진수 근서
유족대표 원의 근수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박세원 근찬
전주후인 이진수 근서
유족대표 원의 근수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산 55-1 동점마을 묘소 앞 애국지사 임창무 선생 공적비를 찾아가는 중에 만난 애국지사 이찬의 선생 묘소 안내판
동점마을 입구에서 만난 독립유공자(3.1운동) 임창무 묘소 안내판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484-1 동점마을 앞 버스정류장이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484-1 동점마을 앞 버스정류장이다.
지금부터는 네비게이터가 아니고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가야 한다.
예비군 사격장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고 되어있다.
예비군 사격장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고 되어있다.
마을을 지나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