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여기 연병호, 병우, 병주 삼형제분이 성장하신 곳이기에 투철한 애국정신과 청렴결백하신 얼을 영구히 후손에게 상기시키고자 이 표석을 세우다.
서기 1981년 2월 일
삼광석재 대표 연용흠 세움, 정은 글
서기 1981년 2월 일
삼광석재 대표 연용흠 세움, 정은 글
3형제의 功勳史(공훈사)비가 서 있지만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이곳 서기 1905년 한일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말살되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저 4형제중 병우(병환), 병호, 병주 3형제분이 가족과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애국에 임하신 투철한 혼이 깃든 생가이기에 그 얼을 후세에 알리고저 여기 구국일념을 새기다.
서기 1981년 월 일
삼광석재 대표 연용흠 세움, 연규선 돌, 연정은 글
서기 1981년 월 일
삼광석재 대표 연용흠 세움, 연규선 돌, 연정은 글
연병환 선생 공훈사
연병호 선생 공훈사
연병주 선생 공훈사
명덕정사는 연병호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 1997년 4월에 세웠다.
독립투사 연병호 선생 추모비
육군 제3사관학교 증평지역 동문회
육군 제3사관학교 증평지역 동문회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젊음을 다 바치시고 광복 후에도 애국의 일념으로 평생을 불태우신 고귀한 뜻을 영원히 추모하는 뜻으로 이 비를 세웁니다.
서기 1997년 4월 26일
육군 제3사관학교 증평지역 동문회
서기 1997년 4월 26일
육군 제3사관학교 증평지역 동문회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 추모비
조국의 광복과 애국일념으로 평생을 고귀하게 사신 선생의 뜻을 기리 추모하기 위하여 광복의 해인 1945년(을유생) 출생한 이 지역의 광복동이들이 모여 이 추모비를 바칩니다.
1997년 4월 일 증평도안지역 광복동이 회
조국의 광복과 애국일념으로 평생을 고귀하게 사신 선생의 뜻을 기리 추모하기 위하여 광복의 해인 1945년(을유생) 출생한 이 지역의 광복동이들이 모여 이 추모비를 바칩니다.
1997년 4월 일 증평도안지역 광복동이 회
光復童(광복동)이 명단
김규선 김명근 김병호 김인식 김호은 김진흥 강석만
권두화 남기혁 배철규 변창섭 손석창 송재학 신진찬
심재복 양희서 연기문 연동 연선흠 연영호 연의섭
연인탁 연제관 연제동 연정흠 연창희 오길남 이건식
이근택 이명기 이명동 이배홍 이송재 이영진 이수복
이춘해 임석환 장현식 장현섭 정병흥 조태일 진중일
천병호 최순식 하흥관 황상모 박완규 연규환
강순원 김옥숙 김용옥 김인순 박건자 박수자 박일순
배봉순 봉정애 신금분 안봉인 양도순 연제순 우병순
유상숙 유정순 이금남 이명희 이순애 이정자 이호성
황순식
서기 1997년 4월 일
추진위원 연제관 심재복 정병흥
김규선 김명근 김병호 김인식 김호은 김진흥 강석만
권두화 남기혁 배철규 변창섭 손석창 송재학 신진찬
심재복 양희서 연기문 연동 연선흠 연영호 연의섭
연인탁 연제관 연제동 연정흠 연창희 오길남 이건식
이근택 이명기 이명동 이배홍 이송재 이영진 이수복
이춘해 임석환 장현식 장현섭 정병흥 조태일 진중일
천병호 최순식 하흥관 황상모 박완규 연규환
강순원 김옥숙 김용옥 김인순 박건자 박수자 박일순
배봉순 봉정애 신금분 안봉인 양도순 연제순 우병순
유상숙 유정순 이금남 이명희 이순애 이정자 이호성
황순식
서기 1997년 4월 일
추진위원 연제관 심재복 정병흥
영당 건립기념비
이 비는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의 위대한 일생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국비와 지방비로 생가 보전과 영당을 건립하였으며 김종호 국회의원과 주병덕 충북지사 및 곡산연씨 종친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념사업과 연례 행사 및 선열들에 대한 숭모사상을 후세들에게 전함을 목적으로 한 모임체인 사단법인 연병호선생기념사업회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97년 4월 26일
사단법인 연병호선생기념사업회 일동
이 비는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의 위대한 일생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국비와 지방비로 생가 보전과 영당을 건립하였으며 김종호 국회의원과 주병덕 충북지사 및 곡산연씨 종친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념사업과 연례 행사 및 선열들에 대한 숭모사상을 후세들에게 전함을 목적으로 한 모임체인 사단법인 연병호선생기념사업회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97년 4월 26일
사단법인 연병호선생기념사업회 일동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 공훈사
선생의 자는 순서, 호는 원명, 초명은 병탁, 명준이며 본관은 곡산이다. 1894년 11월 22일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서 부친 연채우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청안 중명학원과 중국 연길 창동학원, 북경대학을 졸업했다.
경술국치에 발분하여 1919년 25세에 중국으로 망명 대한광복단에 가입하고 길림군정분서서기장 참모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정보제공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송세호와 국내로 잠입하여 이병철 등과 비밀항일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국치기념경고문 배포와 외교시보를 발행하여 독립의지를 고취했다. 대한애국부인회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다시 상해로 탈출, 1921년 4월 재외 한인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설립했으며, 1922년에 들어 독립운동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단합을 공고히 하고 1925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되자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를 발표했다. 1929년 12월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한국구민당을 조직, 1931년 12월 신익희들과 한국혁명당을 조직 중앙집행위원겸 선전부장으로 '우리의 길', '독립공론'을 발행하여 독립사상 고취와 독립단체단결을 공고히 했다. 1932년 11월 중국 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을 연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 신한독립당 정무위원회 주임으로 독립세력을 강화했다. 1934년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이 되어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독립공론을 발행하므로 일제 앞잡이인 상해 거류 조선인의 고발로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아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 출옥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훈련부장,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와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으로 김구선생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창했다. 선생은 항상 검정 두루마기에 검정고무신을 신었고 왕소금으로 치아를 닦았다. 선생은 권력에 아부하거나 권모술수에 흔들리지 않는 과묵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일생을 오직 애국일념으로 살다가 1963년 1둴 26일 새벽 2시 도안면 석곡리 생가에서 운명했다. 영결식은 2월 3일 도안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렸으며 수천장의 만장이 나부끼는 가운데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의 조사와 수많은 도민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치렀고 유해는 석곡리 유해는 석곡리 선영에 안장됐다가 1976년 10월 26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했다. 정부는 지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위해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같이 선생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맏형 병환 선생의 투철한 애국정신의 가르침과 후원에서 이루어졌다. 병환 선생은 일찍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1909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0년 일제가 나라를 빼앗자 의분강개하여 병호, 병주, 병오 3형제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에 참여시켰다. 한편 선생은 독립군의 군자금 지원과 무기 조달 지원, 비밀연락망 조직, 독립운동가에 대한 후원 등을 하는 이유로 1919년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상해로 탈출하여 대한인거류민단원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중국국민회의, 북간도, 러시아 등과 대내외 독립정보 활동을 하다가 1926년 5월 14일 중국 진강현에서 족구의 광복만을 기원하면서 이역에 잠들었다. 묘지는 상해의 정안사 영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중국문화혁명 때 손실되고 늦게서야 선생의 독립운동사실이 밝혀져 2008년 3월 1일 대통령표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일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독립과 구국에 대한 일념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고 되새겨야하는 애국의 지침이며 길이길이 후손에게 남기고자 이 글을 쓰다.
2009년 12월 일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 기념사업회
선생의 자는 순서, 호는 원명, 초명은 병탁, 명준이며 본관은 곡산이다. 1894년 11월 22일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서 부친 연채우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청안 중명학원과 중국 연길 창동학원, 북경대학을 졸업했다.
경술국치에 발분하여 1919년 25세에 중국으로 망명 대한광복단에 가입하고 길림군정분서서기장 참모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정보제공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송세호와 국내로 잠입하여 이병철 등과 비밀항일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국치기념경고문 배포와 외교시보를 발행하여 독립의지를 고취했다. 대한애국부인회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다시 상해로 탈출, 1921년 4월 재외 한인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설립했으며, 1922년에 들어 독립운동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단합을 공고히 하고 1925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되자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를 발표했다. 1929년 12월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한국구민당을 조직, 1931년 12월 신익희들과 한국혁명당을 조직 중앙집행위원겸 선전부장으로 '우리의 길', '독립공론'을 발행하여 독립사상 고취와 독립단체단결을 공고히 했다. 1932년 11월 중국 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을 연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 신한독립당 정무위원회 주임으로 독립세력을 강화했다. 1934년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이 되어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독립공론을 발행하므로 일제 앞잡이인 상해 거류 조선인의 고발로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아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 출옥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훈련부장,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와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으로 김구선생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창했다. 선생은 항상 검정 두루마기에 검정고무신을 신었고 왕소금으로 치아를 닦았다. 선생은 권력에 아부하거나 권모술수에 흔들리지 않는 과묵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일생을 오직 애국일념으로 살다가 1963년 1둴 26일 새벽 2시 도안면 석곡리 생가에서 운명했다. 영결식은 2월 3일 도안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렸으며 수천장의 만장이 나부끼는 가운데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의 조사와 수많은 도민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치렀고 유해는 석곡리 유해는 석곡리 선영에 안장됐다가 1976년 10월 26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했다. 정부는 지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위해 1963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같이 선생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맏형 병환 선생의 투철한 애국정신의 가르침과 후원에서 이루어졌다. 병환 선생은 일찍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1909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0년 일제가 나라를 빼앗자 의분강개하여 병호, 병주, 병오 3형제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에 참여시켰다. 한편 선생은 독립군의 군자금 지원과 무기 조달 지원, 비밀연락망 조직, 독립운동가에 대한 후원 등을 하는 이유로 1919년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상해로 탈출하여 대한인거류민단원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중국국민회의, 북간도, 러시아 등과 대내외 독립정보 활동을 하다가 1926년 5월 14일 중국 진강현에서 족구의 광복만을 기원하면서 이역에 잠들었다. 묘지는 상해의 정안사 영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중국문화혁명 때 손실되고 늦게서야 선생의 독립운동사실이 밝혀져 2008년 3월 1일 대통령표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일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독립과 구국에 대한 일념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고 되새겨야하는 애국의 지침이며 길이길이 후손에게 남기고자 이 글을 쓰다.
2009년 12월 일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 기념사업회
明德精司(명덕정사)
明德精司(명덕정사)
明德精司(명덕정사) 현판
명덕정사에서 바라본 생가 뒷모습
원명 연병호 생가 안내판이 보인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에 위치한 애국지사 원명 연병호 선생 생가 전경이다.
생가 옆에는 明德精司(명덕정사)가 함께 보인다. 명덕정사는 연병호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생가 옆에는 明德精司(명덕정사)가 함께 보인다. 명덕정사는 연병호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명 연병호 생가(圓明 延秉昊 생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
소재지: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
이 집은 독립운동가인 연병호(延秉昊, 1894-1963) 선생의 생가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작은 초가집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지붕 등 일부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가 1986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1996년과 1998년에 생가보수사업이 추진되어 영당(影堂)과 삼문(三門)이 건립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병호의 자(字)는 순서(舜瑞), 호는 원명이다. 맏형인 병환(秉煥)을 뒤따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독립혁명당(獨立革命黨)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피선되었다. 1937년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헌의원 시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1963년 석곡리 생가에서 타계했으며 그 해 3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
소재지: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
이 집은 독립운동가인 연병호(延秉昊, 1894-1963) 선생의 생가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작은 초가집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지붕 등 일부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가 1986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1996년과 1998년에 생가보수사업이 추진되어 영당(影堂)과 삼문(三門)이 건립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병호의 자(字)는 순서(舜瑞), 호는 원명이다. 맏형인 병환(秉煥)을 뒤따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독립혁명당(獨立革命黨)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피선되었다. 1937년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헌의원 시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1963년 석곡리 생가에서 타계했으며 그 해 3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했다.
愛國志士 故 延秉昊 先生 生家(애국지사 고 연병호 선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