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530-2
- 탐방로그
- 이주승 이조승선생 의병공적 숭모비에서 이주승, 이조승의 묘까지는 8km 떨어져있으며, 차량을 이용할 시 18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명이 각?부임참모종사를 분담하였는바 선생 형제는 항상 우국애정으로 국운을 통탄하다가 분연히 부임하고 종사에 동참하여 복수설치를 맹세하였다. 휘암 선생은 군자금의 사재헌납과 의병모집 등을 비롯하여 군무전반에 고심하며 정성을 다하였는바 유인석 선생이 간인의 모해를 당하였을때는 휘암 선생의 절충대절의 상소를 숙부인 승지 이동재와 대신 민영기를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의혹을 풀었고 다시 대의명분의 의병문헌을 유기환을 통하여 봉상하였으며 의병이 중과부적으로 제천에서 왜군에게 패한 뒤 만주에 들어가 광복운동을 할때에도 거액의 군자금을 이만원 선생을 통하여 송금하였고 정미년에 이강년 선생이 재의거를 할때에도 종사가 되어 찬책하는 등 무릇 14~5년에 걸처 진충갈력하여 충의를 떨치었다. 관의제 이조승 선생은 사백철? 선생과 동심동력하여 유인석 선생의 측근에서 수족같이 생사를 돌보지 않고 항상 분전하였는바 소의신편에 이조승 정?용 박제달 홍선표 홍사 96인은 단지 충의에 도타울뿐 아니라 겸하여 사우사생의 의도 혈심변사하여 선후좌우에서의 의기의 성세진강 이실로 그 힘에 의뢰한 바가 크다고 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선생의 절의가 장함을 알 수 있으며 만주에서도 유인석 선생을 중심으로 지성을 다해 분전하였으나 불행히도 제천의 남산전투때 입은 총상이 재발한데 더하여 북방의 풍토에 맞지 않아 병이 침중악화하여 방년 28세로 별세하니 구국의 일념으로 참여하여 장장 7년간 가사를 돌보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바쳐 오직 복수설치와 국권회복을 위하여 항전하였으니 진정 위대하고 장하도다. 비록 전쟁에는 패하였으나 승하였다고 사하였으나 생하였으니 숙연하지 않으리오. 오늘날 우리겨레는 이 존엄하신 충령들 숭모하면서 앞으로 영원히 민족의 정기를 확립하고 선열의 정신을 선양하여 전통문화를 분연히 빛대어 대의명충을 숭고하게 높여야하며 그와 반면에 그 당시의 대역무도한 매국노들을 예리한 ??로 ??에서 ??이어야
한다. 금차 현충사업을 진행함이 만시지탄은 있으나 대행이며 이제 제천군 노인회에서 이 비문을 청하기에 평일 의병사를 보고 선열들의 우국충절을 항상 앙모하던바라. 그리하여 감히 인문의 부족함을 잊고 참람하게 사기의 대략을 찬하노라. 아! 후인들은 길이 효칙하여 위국진충할 지어다. 휘암 선생과 관의제 선생의 묘소는 북노리 뒤산 옥녀봉 양좌원에 모셨는데 휘암 선생의 철사 이구영 옹과 관의제 선생의 영손 이숙훈 씨가 봉사하고 있다.
단기 4322년 5월 일 제천의병유족회장 강성렬 근식
단기 4322년 5월 일 제천의병유족회장 강성렬 근식
제천시 한수면 송계1리 530-2에 있는 이주승, 이조승 선생 창의숭모비를 찾아왔다.
휘암 이조승 선생 관의제 이조승 선생 의병 공적 숭모비
휘암 이조승 선생 관의제 이조승 선생 의병 공적 숭모비
이조승 선생의 자는 대재 본관은 연안 호는 휘암이다. 사제 이조승 선생의 자는 기중 관의제는 그의 호이다. 때는 조선 말기 왜적의 침략흉계가 날로 더욱 심하고 이에 친일 역당이 왜노가 되어 마침내 고종 32년 을미 8월에 역도들이 왜구를 이끌고 범궐하여 군상을 모욕하고 국모을 시해하며 11월에는 단발령을 내리고 국권약탈을 강행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수의 충신들은 참화를 입고 대신으로부터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왜노의 일색이 되니 국운의 위급이 조석에 달려있었다. 이때 임하의 유생과 초야의 전부들이 춘추대의와 위정척사의 의기를 들고 제천에서 이러나 의암 유인석 선생이 의병 대장을 이춘영 이하 안승우 서상렬 주용규 신지수 이필희 이범직 등 여러 선생 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