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산2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시멘트길과 비포장도로가 계속 반복되었다.
이곳부터 충주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GPS 좌표를 남기기 위해 주요지점마다 촬영을 하였다.
네비게이터에서는 이곳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로 간주하고 계곡 방향을 가리키면서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위성지도로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야 하고 다음 로드뷰에서는 오른쪽으로만 길안내가 나온다.
하지만 묘소가 있는 왼쪽으로도 새로운 시멘트 길이 되어있고, 문도 열려 있었다.
더구나 임도의 이름이 북노임도(애국지사 임도) 530m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두 분의 애국지사 묘소 때문에 건설된 임도로 보인다.
아마도 두 분의 애국지사 묘소 때문에 건설된 임도로 보인다.
한쪽이 낭떠러지이고 좁은 길을 오다 보니 촬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임도의 끝 지점에는 작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임도의 끝 지점에는 작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위쪽에도 묘비가 보여서 올라가 보니 다른 분의 묘소이었다.
또 중간에는 묘소가 있었다가 이장한 곳도 있었다. 아마도 충주댐으로 찾기가 힘들어서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위성지도상으로는 탁 트인 공간에 2기의 묘소인 줄 알았는데, 총 3기의 묘소가 있었다.
두 형제분 애국지사 묘소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매우 긴장되었다.
아래쪽에 있는 이조승 선생 묘소
秀士 延安李公 寬毅齋 諱 肇承 之墓 配 孺人 達城徐氏 祔左
(수사 연안이공 관의재 휘 조승 지묘 배 유인 달성서씨 부좌)
(수사 연안이공 관의재 휘 조승 지묘 배 유인 달성서씨 부좌)
秀士 延安李公 寬毅齋 諱 肇承 之墓 配 孺人 達城徐氏 祔左
(수사 연안이공 관의재 휘 조승 지묘 배 유인 달성서씨 부좌)
(수사 연안이공 관의재 휘 조승 지묘 배 유인 달성서씨 부좌)
부군의 휘는 조승 자는 기중 호는 관의재 본관은 연안이다. 시조는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유임 연안백에 봉해진 휘 무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삼괴 문헌으로 유명한 저헌 문강공 휘 석정은 부군의 15대조이고 변무주로 이름난 좌의정 월사 문충공 휘 정귀는 11대조 대제학 이조판서 백주 문정공 휘 명한은 10대조 예조판서 증 영의정 청호 문숙공 휘 일상은 9대조로 3대를 연이어 문형이 됨으로서 세상에서 명가라 칭
부군의 휘는 조승 자는 기중 호는 관의재 본관은 연안이다. 시조는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유임 연안백에 봉해진 휘 무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삼괴 문헌으로 유명한 저헌 문강공 휘 석정은 부군의 15대조이고 변무주로 이름난 좌의정 월사 문충공 휘 정귀는 11대조 대제학 이조판서 백주 문정공 휘 명한은 10대조 예조판서 증 영의정 청호 문숙공 휘 일상은 9대조로 3대를 연이어 문형이 됨으로서 세상에서 명가라 칭
하였다. 조는 감역 노강 휘 민익이고 고는 거사 포헌 원재이며 비는 안동김씨로 참봉 언근의 따님이다. 부군은 고종 계유(1873년) 3월 13일 둘째 아들로 출생하니 미목(眉目)이 청수하고 기상이 호첩하며 재품이 영민하여 정축 5세에 시학 신사 9세에 능히 칠언시를 지어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신묘 19세에 이르러 국운의 위급이 조석지간 일때 과거를 위한 학문을 결연히 중단하고 의암 유인석 의진에 종사로 부진 지성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제천 남산전 투때 입은 총상이 악화되고 의암을 따라 후일을 도모하던 이국 만주의 풍토가 병세를 심중악화시켜 고종 기해(1899년) 겨울 귀국 환가하여 그 다음해 광무 4년 경자(1900년) 정월 14일 방년 28세로 후사 출생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니 아- 장장 7년여를 불원가사하고 오직 복수설치와 국권회복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그 우국충절이 결연하다. 북방을 왕래할 때 지은 북정시 70운과 서행일기를 남기고 부형과 족당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면결 새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어 운명하니 의암은 부음을 듣고 3일간을 불식통곡하였다 한다. 배는 달성서씨 상우의 따님으로 부군이 棄世(기세)한 다음 유복자 복영을 두었고, 손자 중훈과 숙훈
하였다. 조는 감역 노강 휘 민익이고 고는 거사 포헌 원재이며 비는 안동김씨로 참봉 언근의 따님이다. 부군은 고종 계유(1873년) 3월 13일 둘째 아들로 출생하니 미목(眉目)이 청수하고 기상이 호첩하며 재품이 영민하여 정축 5세에 시학 신사 9세에 능히 칠언시를 지어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신묘 19세에 이르러 국운의 위급이 조석지간 일때 과거를 위한 학문을 결연히 중단하고 의암 유인석 의진에 종사로 부진 지성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제천 남산전 투때 입은 총상이 악화되고 의암을 따라 후일을 도모하던 이국 만주의 풍토가 병세를 심중악화시켜 고종 기해(1899년) 겨울 귀국 환가하여 그 다음해 광무 4년 경자(1900년) 정월 14일 방년 28세로 후사 출생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니 아- 장장 7년여를 불원가사하고 오직 복수설치와 국권회복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그 우국충절이 결연하다. 북방을 왕래할 때 지은 북정시 70운과 서행일기를 남기고 부형과 족당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면결 새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어 운명하니 의암은 부음을 듣고 3일간을 불식통곡하였다 한다. 배는 달성서씨 상우의 따님으로 부군이 棄世(기세)한 다음 유복자 복영을 두었고, 손자 중훈과 숙훈
그리고 윤봉호에 출가한 손녀 양육을 즐기다 신유(1951년) 정월 7일에 졸하니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산20번지에 장사한 부군과 합부하였다. 묘비건립에 즈음하여 밝혀둘 것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사실과 금반 묘비건립실사에 제천시장과 국가보훈처 충주지청장의 지원이 있었음을 밝힌다.
2001년 9월 일 손 숙훈 읍혈 경립
2001년 9월 일 손 숙훈 읍혈 경립
그리고 윤봉호에 출가한 손녀 양육을 즐기다 신유(1951년) 정월 7일에 졸하니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산20번지에 장사한 부군과 합부하였다. 묘비건립에 즈음하여 밝혀둘 것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사실과 금반 묘비건립실사에 제천시장과 국가보훈처 충주지청장의 지원이 있었음을 밝힌다.
2001년 9월 일 손 숙훈 읍혈 경립
2001년 9월 일 손 숙훈 읍혈 경립
제천시 한수면 탄지리 264에 있는 애국지사 이주승, 이조승 묘소 안내판을 다시 찾았다.
형제 두 분의 묘소가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뒤산 옥녀봉에 있으며,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배를 타고 가야만 당도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애국지사 이조승 이주승 묘소
500m 정도를 걸어가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면서 이런 안내판이 몇 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