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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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 981-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유의 함성은 전원에서, 도시에서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 공장에서 진동했다. 전 조선의 민중은 자유를 아직껏 망각한 적이 없다. 따라서 자유를 요구하고 독립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를 요구한다. 우리 전 민중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나가 자. 서로 손을 맞잡고 일본제국주의의 아성을 습파하고 다시 자유의 서광이 우리 머리 위에 도래하도록 육탄으로 싸우자. 자유의 종은 울린다. 자유의 음성은 들려오고 있다.
- 여산 이용준 선생이 활동했던 남화한 인연맹의 선언문 중에서-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 981-3에 위치한 애국지사 여산 이용준 선생의 흉상을 찾아왔다.
여산 이용준 선생의 자취
1907년 충북 제천 봉양면 원박리 출생 (8월 16일)
1919년 제천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 참가
1926년 경성 중앙고보 진학 (중퇴)
1927년 신간회 가입
1930년 중국으로 망명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 가입 (5월 15일)
1932년 천진 일본총영사관 투탄의거 (12월 16일), 친일파 왕정위 처단의거, 연충열·이규서 처단의거
1933년 육삼정 의거 (3월 17일)
1935년 친일파 이용로 처단의거 (3월 25일)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피선, 조선혁명자연맹 결성
1938년 북경에서 일경에 체포됨 (12월 18일)
1940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미수·폭발물 취급법 위반·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 선고받음 (11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1944년 출옥
1946년 대한보국군단 제1사단 사령관으로 활동 중 공산당에 피격 사망 (1월 17일)
1973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친형인 단암 이용태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
천의 얼굴로 사선(死線)에 들어 신출귀몰했던 흰양복의 신사(紳士) 정의를 위하여 청춘을 바쳐 모난 듯 한걸로 간 테러리스트, 자유에 목이 탄 망국민의 분노로 도는 듯 외길로 간 아나키스트, 허나 나는 안다. 그분의 뜻을. 독립을 위하여선 뭐든지 할 것임을.
- 여산 이용준 선생에 대한 조카 이영재의 회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