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피체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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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436
탐방로그
운강 이강년 피체 유적비는 포전리 마을입구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피체 유적비
雲崗 李康秊 義兵大將 被逮 遺蹟碑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피체 유적비
雲崗 李康秊 義兵大將 被逮 遺蹟碑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피체 유적비
雲崗 李康秊 義兵大將 被逮 遺蹟碑
운강이 백석동(白石洞)에서 붙잡힐때 읊은 시 두 수
(被執口拈二首,피집구념이수)
서울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포박시 지음 1908년 6월 4일, 양 7월 8일

오십세에 죽기를 결단한 마음
지금에 어찌 구차하게 살고 싶은 마음있으리!
의군(義軍(에 맹세하고 다시 창의(倡義)하였건만
끝내 복수하기 어려우니
지하에서도 오직 싸울 뜻을 가졌네.

길기도 하여라 여름날 인적조차 드물구나!
교활한 놈들 말끝마다 살길을 찾으라 하네.
이 한 몸 다만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를 지켜
당당히 죽으려 하네 슬픔을 말하지 말라.

尊王攘夷 :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이다.
2021년 10월 12일 건립(建立)
(사) 충북민예총 제천단양지부

충북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옛지명 : 白石洞) 마을주민 일동
운강 이강년(1858~1908) 의병대장은 1908년 7월 2일 호좌의진(제천의병) 70여명과 포전리에서 까치산으로 이동중 일본군 제23연대 제천수비대의 기습사격으로 2시간 정도 교전중 왼쪽 발목 복사뼈에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도선봉 하안서 등 7인의 전사자 중 한 의병에게서 서류와 도장집을 보았고, 부상자의 핏자국 따라 추적하여 온 모리(森)순사에게 피체(포전리 135번지 일원) 되었다.

운강이 체포된 후 마을 사람이 떠온 물을 일본순사가 전하려하자 내동댕이 쳤으며 "내가 이미 잡혔으니 어쩔 수 없구나, 도선봉 하한서와 7인의 시신을 잘 묻어주오." 피눈물로 당부하시며 제천으로 압송되셨다. 제천수비대장의 심문에 "나는 38살(1895년)부터 51세(1908년)까지 13년간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붙잡혀 희망이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운강은 한말 일본침략에 많은 의병전투에서 승전으로 애국헌신하였으나 까치산 전투시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이에 우리는 일본의 국권침략에 맞서 사생취의(捨生取義)와 구국항일 의병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기리며, 각골통한(刻骨痛恨)의 피체 항전지(抗戰地)를 결코 잊지 않고자 이 비를 세운다.
被擒時口呼(피금시 구호)
운강이 까치산 전투시 피체후 읊은 詩

너무나 무정한 탄환이여
복사뼈에 맞아 더 나아갈 수 없구나!
만약 가슴이나 뱃속에 맞았다면
욕되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

까치성(작성산)에서의 패전 후 읊은 詩
산재 이만원(汕齋 李萬源)

때가 이롭지 않으니 말(馬)도 나아가지 않고
까치성의 구름 낀 해도 슬픔을 머금었네
패한것도 천운이니 못싸운 탓은 아니라오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올 날을 기약하네
살아있는 증인 포전리 느티나무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장군을 기리며 유석 정인목(송운 정운경 의병대장 증손녀)

한백년 살기도 힘든 인생인데 마을을 지키며 300여년 살고 있는 너에게 궁금해 묻고 싶은 애기가 참 많구나
운강 선생님 왼쪽 발목 복사뼈를 무심한 총탄히 관통하던 날 천지가 슬픔에 잠겼고
포전천이 핏물로 범람하였으며 산천초목이 숨 죽여 울었지
하한서를 비롯한 7인의 전사자를 잘 묻어달라며 부탁하시고 이천만 동포를 걱정하시며
적이 떠드린 바가지 물을 버리시며 크게 꾸짖어 굴하지 않으시고 서울로 이송되시던 그 모습
그날도
귀한 그 말씀 들으며 죽음의 길을 가시는 선생님을 동구밖까지 배웅하였구나 역사의 증인 포전리 느티나무야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마을입구에 건립된 운강 이강년의병장 피체 유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436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