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405-4
- 탐방로그
- 동학농민혁명군 충청도 수접주 이헌표공적비는 용산2리 경로당 앞에 있다. 근처에는 용산2리 버스정류장이 있고 버스정류장까지 도보로 1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가 되셨던 것이다. 이처럼 선생께는 시대를 인식하는 비범한 통찰력과 의를 실천하시는 용기 만인의 표상이셨다. 따라서 동학사상에 의한 보국안민과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는 그 위세가 전국에 떨쳤으며 마침내는 1899년 동학혁명이 분기하게 되었고 이 곳 충청도 전역에서도 동학농민전쟁이 크게 발호하였던 것이다. 이때 해월 최시형 교주는 이헌표 접주에게 동학혁명군을 구원도록 명하셨으며 이헌표 접주는 즉시 창의기병하여 1896년 보은 장내리와 종곡리 등 전투현장에 수백명의 원군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용전의 결과는 일군 및 관군과의 세불리로 다수의 희생자를 낳았으며 동학혁명군은 패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전지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들의 유족들은 중원군 선당리 선생의 사가에 몰려와 가족의 생환과 보상을 강청하였고 관아에서는 온갖 박해와 고초를 지웠으며 그러한 풍우 속에서 선생의 권솔(眷率)들은 풍비박산되어 구명도생하는 처지였으니 나라 위한 의로운 혁명가의 역정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또한 혁명전쟁 이후 조정에서는 개혁세력들을 더욱 박해하였고 난세중에서도 선생께서는 결코 의연하셨으며 나라 위한 혁명단심과 포교를 통한 개혁운동은 더욱 강렬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교세가 날로 확산되어 가고 민심과 천심이 개혁의 편에 서게 되자 이를 질시한 이곳 토반인 박천오 외 2인 등은 선생을 무고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내용인즉 이헌표 선생과 동학도당들이 결사하여 음성군수 민진호와 관속들을 타살하고 민가에 방화를 음모하였다는 황당한 무고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로인하여 1903년 10월 13일과 1904년 1월 9일 2회에 걸쳐 선생께서는 정기영 정진복 곽근회 박광여 천만보 김덕찬 등과 함께 관아에 속박되어 억울한 악형과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그후 소소배들의 무고와 악행은 사필귀정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실상을 관찰하고 의분을 느낀 이방 최영주로 하여금 이곽 포원록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이 사실들은 오늘날 이씨 곽씨 가문에 전하여지고 있다. 이처럼 선생께서 실천하신 의로운 일에는 고난과 애환이 있었으니 이는 봉건적 질서와 개혁 세력간에 엄청난 시대적 갈등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근대 민주사회 건설의 시발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혁신적인 근대적 이념을 계승시킨 선생의 크신 뜻과 인격에 오직 숙연할 뿐이다. 오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충북대학교 차용걸 박사의 역사적인 고찰로 선생의 공적을 발현시켜 높으신 은덕을 기리고 후세인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우리의 뜻을 여기에 모았다. 선생의 절의와 애국충정은 우리들의 사표이십니다. 선생이시여 영원하소서...
농민 혁명이 동학도의 패전으로 끝나고 이헌표씨가 용산리에 와서 거처를 잡고 있을때 최해월 성사께서는 이헌표 접주집에 당분간 은신을 했다. 성사께서는 고민을 잊기 위하여 노끈을 꼬시었다. 노끈은 장날 시장에 내다팔아 이인용씨를 시켜 청올치를 사오게 했다. 5일만큼 장날이 온다. 성사께서 노를 잘 꼬시기 때문에 장날이 오기전에 청올치가 떨어지면 꼬아놓은 노끈을 다시 풀어서 노를 꼬시었다고 한다. 이 소문은 최성사 난중일기에서 나온다.
기록인 2008년 10월 5일 용산2리 이기준
기록인 2008년 10월 5일 용산2리 이기준
용산2리 경로당 앞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충청도 수접주 이헌표 공적비를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충청도 수접주 전주이공 헌표 공적비
선생은 일찍이 총명이 절인하고 기개가 비상한 유학자로서 관향은 전주요 자는 헌표이시고 호는 정회이시며 조선 제2대 정종대왕의 9남인 석보군의 14대 후예시다. 조선조말(1841년 4월 10일 - 1909년 2월 22일) 중원군 신니면 선당리 유도의 가문에서 출생하셨으며 당시 나라의 형세는 열강들의 외세로부터 우리 국토 탐닉이 극심하였고 안으로는 봉건적 사회질서로 하여금 일대 변혁을 요구하는 전환기였다. 또한 조정 관속들의 부패와 학정은 민생을 참담케 하였으니 이에 의분을 느끼신 선생께서는 제도창생을 위한 개혁사상의 길을 택하시게 되었다. 또한 선생께서는 인간평등에 기초한 민본주의와 인권주의를 주창하시고 천심은 곧 민심이라는 인내천 철학과 후천개벽의 동학사상을 실천하신 의인이요 사상가이셨다. 또한 선생께서는 출임에 연연치 않으신 혁명가이셨고 사회제도의 계급철폐와 토지제도의 개혁 등 민권운동의 기치를 높이 든 선각자이셨다. 선생께서는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시어 1892년에 접주를 하셨으며, 1893년 충주 접주, 1894년 괴산 접주, 그리고 1897년 괴산접주에 재임되시었고, 1900년 4월에 음 ○접주를 비롯하여 1905년 정월에는 충청도 수접주의 대임을 받아 봉건세력에 저항하고 근대사회 제도를 위한 개혁운동의 선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