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이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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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 산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김해 김공 휘 용이 공적비
애국지사 김해김공의 휘는 용이 자는 삼현파로 문민공 탁영선생 14대손 용만이와 유인 경주김씨의 2남으로 1889년 경인12월 11일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 마을에서 출생서부터 애국지사가 될 기상을 지녔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때 애국충절로 구국활동에 앞장서는 것이 국민된 도리이며 국가의 소명이라. 경술국치와 고종황제의 시해라는 국가존망의 위난을 당하자 공은 자주독립을 일생일대의 대명제로 삼아 독립만세운동으로 분연히 궐기할것을 결심하고 수묵리 동지등과 밀의하여 국기와 선언문 준비 배부하고 이원장날인 1919년 3월 27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의거의 날이 밝자 광목에 대자로 쓴 독립만세의 기치를 하늘높이 휘날리며 군중앞에 나아가 선언문을 낭
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그 드높은 의기는 창공을 찌르고 장엄한 함성은 산천을 진동케 하였다. 애국충절이 발로된 수백 군중은 분화구의 화염처럼 태풍 앞에 성난 파도처럼 궐기하여 일대 시위를 감행하니 당황한 왜병들은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니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공은 격분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고 왜병주재소를 전격 파괴 방화한 후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고 다시 옥천의 왜병 승마의 앞다리를 화목으로 처서 부러뜨리고 대전에서 증원된 적병의 협공을 받아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용맹하게 투쟁하다 체포되니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온갖 잔악한 고문과 옥고에도 오히려 독립의지를 굴함이 없이 공주 옥중 생활에서도 공은 8인의 동지와 함께 형기 3년 동안 계속된 항쟁의 선봉이 되었으니 필부의 높은 뜻도 감히 빼았지 못한다는 말이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가. 출옥후에도 향민에게 국가의 자주독립 정신을 가일층 고취하기 위하여 창씨개명과 같은 왜적의 씨족 말살정책에도 강력히 반대운동을 전개하니 공이야말로 독립운동의 불사신이였던것입니다. 그뒤 공과 같은 애국지사의 독립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이 되어 삼천만 민족이 질곡으로부터 해방되고 반만년 역사위에 조국독립의 서광이 충만하였어라. ...에 깊이 감화된 면민들이 1958년 이원역전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고 1977년 정부에서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니 공의 위업은 한민족의 가슴속 깊이 영원히 빛날것이로다. 많은 옥고의 여독으로 신음하던중 1958년 계해 3월10일에 서거하여 이원면 수묵리에 안장하였으며 배 경주김씨 ?2녀니 1887년 무인 7월 9일생으로 1939년 1월 29일에 운명하니 쌍분하였다. 아들인 종환과 손자인 태면과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같은 지사의 빛나는 애국운동의 업적을 통하여 조국애에 불타오르는 민족과 애국정신으로 무장된 국가는 융성한다는 역사의 순리를 알수있다. 조국애와 민족애의 두가지 정신으로 일관된 공의 일생이야말로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되었고 민족발전의 지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지사는 비록 돌아갔으나 이 국가와 민족이 있는 한 지사의 고귀한 애국심과 희생적 민족애는 도도히 흐르는 저 금강의 물줄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저 대성산처럼 우리나라와 민족의 가슴속 깊이 함께할지니라. 이제 우리는 김지사의 훌륭한 애국애족정신을 길이 본받고자 뜻깊은 이 비를 세우노라.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 수영골 애국지사 김용이 선생의 묘소를 찾고 있다.
주변에 물을 사람도 없고 혹시나 하면서 이곳 저곳을 찾아보고 있다.
카메라로 줌 인하여 당겨보니 저곳인 것 같다.
애국지사 김해 김공 휘 용이 지묘 배 경주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