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마산리 4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격려하사 기어코 민주조국의 광복을 보게 된 것이니 새 나라의 비약발전을 위해 다시금 업을 추진중인 오늘의 조국이 새삼 선생을 추모표창함도 정녕 이러한 때문이라 삼가 이 글을 새겨 영원히 기념코저 한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마산리 42 황간역 광장 대한의사 이건석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이건석(李建奭 1852~1906 충북 영동 출신) 을사조약에 항거하다 순국한 애국열사로서 자는 한경(漢卿), 호는 성석(醒石), 본관은 전주(全州)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토왜(討倭)의 소(疏)를 계속하여 올렸고, 이듬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어느 나라가 승리하든 조선은 피해를 입게 되니 호국의 방책을 세우라고 상소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유생들을 이끌고 궁궐 앞에 나아가 조약의 취소를 강경히 상소하였으며, 고종의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버티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0일 기념사업회에서 이 비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신성인하신 순국선열의 충정을 기리고 추앙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속 깊이 간직합시다.
대한의사 이건석 선생 기념비
한 겨레와 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내외의 적도들과 억세게 싸우다가 대의를 위해 마지막 생명까지 바친다 함은 결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찌기 대한의사 성석 전주 이 건석 선생께서는 문자 그대로 살신성인의 빛나는 충절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니 후손만대엔들 어찌 잊을소냐 선생께서는 단기4185년 임자에 이 고장 황간에서 태어나사 소년시절에 생부모를 여의시고 양부모를 모셔 효성도 지극하셨다. 22세에 성혼하셨으나 높은 뜻을 국사에 두어 가족을 뒤에 남긴채 결연히 상경하셨으니 바라흐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정책이 조국을 침해하는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청일전쟁을 치른 4228년에는 일본공사 미무라를 중심한 저들의 흉모가 극악무도하게도 이 나라 황후를 시해하는 참변이 생기고 뒤미쳐 열강의 치열한 각축이 이
나라의 모든 권익을 분해코저 하다가 마침내 로일전쟁까지 초래하는가 하면 그 결과 4238년 에는 밀제의 위협강박아래 조인된 저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주권이 거의 박탈되니 이동안 선생께서는 불분고신하고 전국토림의 동지들과 더불어 복수토역과 항일구국을 위해 13도 유생 소두가 되시고 복각상소하시기 십수차에 걸쳤으며 때로는 역도처단의 과감한 행동도 기도하셨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일제헌병의 추적이 드디어 선생을 체포 투옥하고 온갖 고문과 사술로 선생의 위국충절을 꺾고저 하였다. 이에 선생께서는 피인된 몸이지만 백절불굴의 기백으로 끝끝내 대의를 굽히시지 않고 육삭동안이나 심혹한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별실 천씨의 단성으로 드리는 사식조차 물리치고 절립단음하시기 14일간에 누차 토혈한 나머지 4239년 병오 5월 10일에 장절하게도 향년 55세의 생애를 손수 목졸라 자진순국하시었다. 선생이 순국하신 다음 그 버선목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영식 응주에게 부탁하시되 "내 국권을 회복못한채 죽게 됨이 천추의 한이라. 오로지 슬퍼말고 네 아비의 뜻을 계승해야만 진실로 내 이들이라" = "鳴呼死矣...."고 밝히셨다. 이같이 하여 남기신 선생의 유훈이 그 자손을 이끌어 기미독립운동에 남달리 공헌토록 하셨음은 물론이요 온 겨레를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