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510-5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510-53 7지사 독립만세 운동비를 찾아왔다.
우리마을 주곡리.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륵당 주곡리는 북에는 충청의 전설을 간직한 백마성 노투성이 우뚝솟아 마주보고 남에는 멀로 표고700미터의 소백산 지맥이 중첩되어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은 길고긴 세월 우리 동민의 생활수가 되어왔다. 봄을 거부하듯 만춘까지 계곡을 덮은 백설과 가을에 붉게타는 만산홍엽은 이 마을동민의 높은 절의와 불굴의 기상을 키워왔다. 전통과 부력을 지닌 우리 미륵담은 오랜세월 영일정씨 밀양박씨 청주한씨 달성서씨 개성김씨 김해김씨와 기와 여러 문성이 대이어 살아오는 130여 대동으로 한말까지 동서면면사무소가 소재했고 아랬마을에는 한길이 관통되어 한양나들이의 기손들이 쉬어가는 저자거리가 있어 활기넘치는 마을이었다. 동구에 있는 원석현현감의 영세불망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보은지심이 새겨져 있으며 영동군 기미년독립만세운동의 시원지로 7지사가 감행한 애국장거은 우리마을의 크나큰 자랑이며 교훈이다. 백마노투의 산록을 남북으로 달리는 경부선과 국도는 일찌기 동민들의 시대감각을 자극하여 진취의 기상과 향학열을 복돋아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70년의 역사를 가진 구세군주곡교회는 동민의 구령과 개화에 이바지한바 공이 다대하다. 또한 일제학정시 유지인의 독지로 미산학원을 설립하여 수백의 한빈아동에게 국민학교과정을 이수케하였음은 잊을수 없는 사실이다. 6.25동란으로 폐허가된 마을은 온 동민의 합심협력으로 재건되어 1959년에는 군내에서 제일먼저 포도를 도입하여 마을 소득원의 주작목이 되어 영동명산 포도의 명성을 떨치고 잇으며 군내일원에 보급되었다. 20여년의 역사를가진 마을포도조합은 협동영농의 구심체로 튼튼한 기반이 되어 동민의 소득증대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1968년에는 영동군의 모법부락이 되고 정부시책에 힘입어 사통팔달한 마을안길에는 각종차량이 자유로이 통행핼수있다. 1974년에는 우수새마을부락 1986년에는 영동군홍보마을로 지정되어 복지농촌건설에 정신하고 있으며 우리동민은 농자지천하지대본의 일념으로 농업을 사랑하고 숭조위국의 미덕을 숭상하며 마을의 전통과 긍지를 후손에게 길이 계승코저 이비를 세운다.
7지사 독립만세운동비
7지사 독립만세운동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25-1-18 / 관리자 : 주곡리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게 되었고, 이에 우리 민족은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이해 4월 4일 이곳 영동면에서도 2천 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습니다. 이 비는 이때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태규, 장인득, 한광교, 한의교, 박성하, 정우문, 정성백 7인의 애국지사의 충절을 기리고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신성인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고 추앙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 속 깊이 간직합시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게 되었고, 이에 우리 민족은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이해 4월 4일 이곳 영동면에서도 2천 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습니다. 이 비는 이때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태규, 장인득, 한광교, 한의교, 박성하, 정우문, 정성백 7인의 애국지사의 충절을 기리고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신성인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고 추앙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 속 깊이 간직합시다.
기미 삼일만세운동은 이 겨레가 조국의 독립자존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청사에 빛나는 쾌거였다. 경술국치후 십개성상 일제의 잔악한 총칼에 짓밟힌 이 강토가 초토화되매 온 겨레의 울분은 하늘에 닿았다. 국망의 통한을 가슴에 안고 수많은 애국열사들이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의 굳은 의지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마침 고종황제의 33인이 역사적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수만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1대시위를 감행했으니 어찌 장거가 아니랴. 이 민족독립운동은 겨레의 애국심을 용동시키는 도화선이 되어 그 거센 물결은 마침내 이 나라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우리 고장 영동의 만세운동은 이마을 주곡리에서 시원되어 신속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기미년 3월1일 전 승지인 이마을 원로 송암 정태헌의 집전으로 주곡동민일동이 동구밖 광장에 모여 광무제추모제례를 거행 망국의 한을 통분해하고 삼가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니 이마을 열혈청년들의 끓는 가슴에는 저마다 국권쟁취의 굳은 의지가 용솟음쳤다. 이들 중 진작부터 은밀히 거사의지를 결집한 20대 청년들은 이에 크게 감발되어 감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군적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하였으니 그들이 곧 김태규, 장인득, 한광교, 정성백, 한의교, 박성하, 정우문의 7지사였다. 거사장소와 날짜를 영동의 장날로 결정한 7지사는 드디어 3월 4일 읍내 아랫장터 솟전안집에서 회동 주모 박명월이 마련한 주안으로 일배를 나누며 최후의 맹약을 굳게 다진 뒤 결연히 가두로 진출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나가매 수많은 장꾼과 읍민이 대열에 합세하니 시가는 순식간에 군중의 물결로 뒤덮였다. 시위군중은 점차 홍수처럼 불어나 무려 3천여명의 시위대열이 가로를 누비며 만세를 외치니 격앙된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드높은 기세는 천지를 뒤덮었다. 노도같은 군중의 물결에 경악한 왜경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총검에 6명의 시위군중이 무참히 희생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참상에도 7지사의 충용한 열혈단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왜경의 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저항하다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니 그들의 고통이 어떠하였으랴. 극심한 옥고에도 유관순열사의 옥중투쟁에 적극 가세하여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니 장하도다. 그 높은 기개여 빛나도다. 그 굳은 절의여 이제 가신 님의 숭고한 애국심을 길이 경모하고 후손들에게 영세불망의 귀감으로 삼고자 우리 주곡리 동민일동 출향인사 그리고 그 높은 뜻을 기리고자 하는 유지들의 뜻을 함께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