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3.1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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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29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독립운동기념탑
이락연, 김수원, 이채연, 이택주, 이봉연,이광연, 이상찬, 이진국, 여병규,이채(李采),이관연, 이헌주, 이기주, 이흥현, 이성주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 병서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수난기에 빼앗긴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 찾기 위한 위대한 민족항일운동이었다. 영동 양산의 면민들도 민족의 대 역사에 호응하여 동참하였으니 이제 여기에 그 기록을 남김은 충절의 고장 영동 양산을 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도 내 고장 선열들의 숭고한 모습을 전하기 위함이다. 1919년 2월 충정공 민영환선생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의 반대 상소에 앞장섰던 승정원 승지 이기영선생과 공의 서랑 이봉인공은 빙부의 뜻을 받아 항일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3월 20일 고향인 가곡리에 내려오신 공은 대대로 이 고장에 터 잡아 살아 온 인천이씨의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양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청년단이 조직되고 치밀한 계획끝에 거사일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 있는 이웃 학산의 장날인 3월 30일로 정하였으며 청년들은 그날까지 태극기를 만들어 면민들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이때 이 거사계획을 눈치챈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과 이성주는 성급한 마음에 흑판에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써서 도로가에 세워놓고 시위를 벌이다 왜경에게 체포되는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약속된 3월 30일 청년단장 이관연은 단원들과 함께 면민들을 선동 격려하며 학산 장터로 진출하였고 때 맞추어 영동-무주간 도로공사에 동원되었던 부역꾼들이 합세하니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돌을 던지며 학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당시에 도적 왜경들도 그 위세에 눌려 태극기를 들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지며 그 와중에 구속되었던 이성주와 이흥연도 구출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지원병이 동원되자 군중은 흩어지고 청년단장 이관연과 단원 이기주 이현주등은 피신 할수 있었으나 여러 명의 청년단원과 시위군중은 체포되고 말았다. 고향의 어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이 고장의 청년은 너나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가운데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몇분은 광복과 함께 기록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기도 하였으나 총칼의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이에 당시의 거사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의 정령을 추모하고 현양하며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유족과 함께 제향하자는 뜻도 더불어 이 자리에 함께 올렸다. 이 탑이 서기까지에는 가곡리 출신 준봉 이경주와 충북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인산 이동호의 제안과 요청으로 발족된 양산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의 노력과 그리고 충청북도와 영동군의 지원비 9천6백만원과 추진위원및 유족들의 헌성금 4천2백9십만원을 합친 1억3천8백9십만원의 건립자금으로 세워졌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293-2 양산초등학교내 양산3.1독립운동기념탑을 찾아왔다.
조양학교 설립기념비
조양학교설립 일백주년 기념비
비봉산 정기 뿜어서 이룩한 이땅을 유유히 흐르는 금강수 맑은 물이 호위하듯 감싸안은 바로 이곳에 조양학교 설립되니 융희4년이라 서기로는 1910년. 금년이 바로 일백주년이 되는 해다. 죽림서당과 조양서당이 합쳐서 조양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이름 조양은 봉명산 동쪽 조양에 봉황이 울면 성인이 난다는 고사에 기인했다. 조양이란 지명은 신라때부터이며 양산팔경은 수려한 이름난 명승지이다. 강선대 봉황대 비봉산 여의정 영국사 용암 자풍당 함벽정이다. 이 유서깊은 고장에 조양학교가 설립되니 초대 교장에 호고재 이상영이고 손자인 금은 이명주가 일했다. 조양학교 설립에 애쓴 분들은 이원기 이상덕 이상순 이상윤 이승연 이학연 이하연 이채연 이범주 성두식 장남흠 윤용배 윤선남 이학경 이승건 이항식 박승봉 전규한 전신조 정학종등이다.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인천이씨 밀양박씨 창령성씨 함양여씨 하동정씨 옥천전씨등 18개 문중에 이룩한 학교이다. 학교재산으로 교전의 200여두락이나 되었다. 자풍서당, 호계서당, 봉곡서당등의 재산으 기증받고 서당의 학생들을 모아서 이룩한 학교이다. 당시 영동군수 임연상은 12개면장을 동원하여 조양학교를 폐하고 재산을 영동으로 옮기려니 조양학교 설립자인 이명주등 학교의 간부들은 조양학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앙의 학부와 내부까지도 논의되었고 1년여의 항쟁끝에 임연상군수가 방침을 철회하고 사과하므로써 싸움은 끝이나고 조양학교는 유지되었다. 젊은 이명주등이 군수와 싸워서 승리할수 있었던것은 18개 문중의 여러분들이 단결과 호고재 이상구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일제하 1921년 사립 조양학교를 폐하고 조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다시 양산보통학교로 다시 양산심상소학교로 다시 조양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조국광복후 다시 조양초등학교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교이다. 당시 학교 교시는 도덕이었으니 인의예지신충효의 교육정신으로 2000년동안 교과서의 뜻이기도하다. 오산 이동호씨의 간청으로 사양하지 못하여 이와같이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