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덕산 김용호 선생 송재 김평근 선생 부자현창비
김용호(金溶昊) 선생은 본관이 김녕(金寧) 초휘는 필수(弼壽), 자는 광업(光業), 호는 덕산(德山)이며 관조 김녕군(金寧君) 휘 시흥(時興)의 9세손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의 7세손 판교공(判校公) 휘 선방(善方)의 8세손 휘 두철(枓鐵)의 장자로 1843년에 지계리(枝界里:현 점말)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그 기품이 남달리 장대하더니 절충장군 오위장(折衝將軍 五衛將)을 역임하였다. 한말(韓末)에 국운이 기울어 굴욕의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고종 황제가 퇴위당하며, 우리 군대마저 해산하게 되자 선생은 퇴령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고종 황제의 시종원 부경(侍從院 副卿)을 지낸 강두흠(姜斗欽) 등과 함께 항일(抗日) 구국운동에 나섰다. 먼저 강경한 설득으로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영동지회는 해산시켰으나, 일본제국의 강압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에는 치욕의 한
일 합방이 발표되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며칠을 통곡하더니 9월 11일(음 8월 8일)에 동지들과 역말(부용리)에서 국권회복의 밀회를 하던 중 창의(昌義)를 주장하다가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나라 잃은 백성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하며 머리를 벽에다 박고 졸도 급서하였다.
김평근(金平根) 선생은 자가 운칠(云七), 호는 송재(松齋)이며 위 김용호 선생의 제4자로 1870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정의감이 강하더니 아버지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정미(丁未:1907) 의병 때 분연히 항일 의병장 장운식(長雲植) 진으로 들어갔다. 지대장으로 추대받은 선생은 민한식(閔漢植)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옥천을 본거지로 하여 충북 남부와 전북 북부 일대를 누비며 일본인 타도, 친일인사 규탄, 우편취급소 및 세무서 방화, 통신시설 파괴, 의병활동자금 조달 등의 항일활동을 하였다. 그간 금산.무주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와 여러번 대치할번 했으나 번번이 주민들의 제보로 무사하다가 1909년 3월 9일에 체포 당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선생의 체포를 「서장 이하 고심 열성의 성과」라 극찬하고, 선생은 「왜인들의 재판은 받을 수 없다」고 항거하므로 일인 검사가 항소(抗訴)했다 하니, 그 당시 선생의 항쟁의 강렬하였음과 그 기개의 대단하였음을 짐작할만 하다. 선생은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영천(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듬해 나라를 빼앗기고 그 아버지마저 순국하자 불효 불충을 한탄하며 수일간 단식 통곡 하였다 한다. 일본제국은 그 3년 후인 1913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선생의 고향 마을 이름「지계리」마저 「각계리」로 바꾸어 버렸다. 복역을 마친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이름을 현권(顯權)이라 바꾸고 김천 봉산(鳳山)에 은거하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19년 3.1운동 때에는 김천과 상주 시위에 참가하였다. 옥고에서 온 건강 악화로 고향에 돌아와 오래 신음하다가 1924년 음 1월 8일에 세상을 뜨니 그 나이
김평근(金平根) 선생은 자가 운칠(云七), 호는 송재(松齋)이며 위 김용호 선생의 제4자로 1870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정의감이 강하더니 아버지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정미(丁未:1907) 의병 때 분연히 항일 의병장 장운식(長雲植) 진으로 들어갔다. 지대장으로 추대받은 선생은 민한식(閔漢植)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옥천을 본거지로 하여 충북 남부와 전북 북부 일대를 누비며 일본인 타도, 친일인사 규탄, 우편취급소 및 세무서 방화, 통신시설 파괴, 의병활동자금 조달 등의 항일활동을 하였다. 그간 금산.무주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와 여러번 대치할번 했으나 번번이 주민들의 제보로 무사하다가 1909년 3월 9일에 체포 당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선생의 체포를 「서장 이하 고심 열성의 성과」라 극찬하고, 선생은 「왜인들의 재판은 받을 수 없다」고 항거하므로 일인 검사가 항소(抗訴)했다 하니, 그 당시 선생의 항쟁의 강렬하였음과 그 기개의 대단하였음을 짐작할만 하다. 선생은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영천(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듬해 나라를 빼앗기고 그 아버지마저 순국하자 불효 불충을 한탄하며 수일간 단식 통곡 하였다 한다. 일본제국은 그 3년 후인 1913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선생의 고향 마을 이름「지계리」마저 「각계리」로 바꾸어 버렸다. 복역을 마친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이름을 현권(顯權)이라 바꾸고 김천 봉산(鳳山)에 은거하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19년 3.1운동 때에는 김천과 상주 시위에 참가하였다. 옥고에서 온 건강 악화로 고향에 돌아와 오래 신음하다가 1924년 음 1월 8일에 세상을 뜨니 그 나이
53세 이었다. 1996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위 두 부자의 충절은 실로 단종(端宗)을 복위시키고 사육신을 영도하다가 순절한 큰 별, 충의공 백촌(白村)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의 혁혁한 충절로서 그와 함께 이 나라 충절의 표상으로 영원히 빛나리라.
1997년 10월 일 국가보훈처장과 영동군수가 삼가 이 비를 세움
글 성균관 전학(成均館 典學) 연일(延日) 후인 정희택(鄭喜澤)
글씨 증손 장규(章圭)
위 두 부자의 충절은 실로 단종(端宗)을 복위시키고 사육신을 영도하다가 순절한 큰 별, 충의공 백촌(白村)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의 혁혁한 충절로서 그와 함께 이 나라 충절의 표상으로 영원히 빛나리라.
1997년 10월 일 국가보훈처장과 영동군수가 삼가 이 비를 세움
글 성균관 전학(成均館 典學) 연일(延日) 후인 정희택(鄭喜澤)
글씨 증손 장규(章圭)
영동군 심천면 각계2리 5-1 지계동 애국지사 덕산 김용호, 송재 김평근(김현권)부자 현창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