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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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16
탐방로그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은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조성되었고 돌성,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죽림광장, 인내천정, 민중광장, 동학동산, 빛의 계단 등의 시설이 있다.
주차장에서 공원 입구로 가는 길에 놓인 둥근 비석들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나타내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돌로 쌓은 성벽 아래 길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시와 문구들이 새겨진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빛의 계단을 오르면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세워져있다. 이렇게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많은 사적들이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보은 북실마을 : 북실전투의 현장으로 영동 용산 전투를 거치며 보은 북실까지 북상했던 동학군은 1894년 12월 17일 밤에 상주 소모영 민보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백범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 선생이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격전을 벌였던 해주성
보은취회(報恩聚會) : 1893년 3월 10일 최수운 교주의 수형일을 기하여 전국의 동학교도들을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에 소집. 수만명의 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과 척양척왜를 외쳤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은 출신 어윤중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로 파견, 이들을 설득시키려 했다.
취어(聚語) : 취어는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의 동태를 탐보한 내용과 양호도어사 어윤중의 활동상황, 그리고 관련 기록들을 모은 문건이고 규장각에 소장되고 있다.
토비대략(討匪大略) : 1894년 9월 10일 경에 민보군을 조직하여 12월 28일까지 동학군을 토벌한 상주 유생 김석중의 일기이다. 북실전투에서 2,500여명의 동학군을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건립
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 12월 17일 아침 영동군 용산을 출발하여 오후 보은읍에 들어설 때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도착한 동학군은 주먹밥을 먹고 모닥불 옆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밤에 누가 공격해 오겠는가?" 긴장을 풀고 모처럼만에 휴식에 들어갔다. 밤이 깊어졌을 때 상주에 있던 일본군과 청주에 있던 관군이 연합하여 눈속을 뚫고 기습공격을 해왔다. 치열한 전투는 그 이튿날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동학군 2,600여명의 피가 눈 덮힌 하얀 북실뜰을 붉게 물들였다. 이 북실전투에서 산화하여 망나니골에 잠들어 있는 동학농민혁명군의 넋을 기리고자 2007년에 탑을 세우고 2015년 위령탑으로 정비하였다. 2015년 봄부터 천도교 제례에 다른 위령제와 원불교에서 천도제를 지내게 되었다.
2015년 9월 보은군수 정상혁
천지인(天地人)은 하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이곳 보은은 해월 최시형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東學)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로 1893년 3월 전국에서 온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기치를 들고 반외세 반봉건 정치집회인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열었던 곳이며, 북접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최대 항전인 북실전투 때 수많은 농민군이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통한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 경제 변화와 민중의식의 성장으로 신분제를 비롯한 사회체제가 심하게 흔들렸다. 특히 19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시장 개척에 혈안이 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권(國權)이 위기에 처했고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무능과 부패로 국가제도가 문란해지고 탐관오리들의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해 백성들의 삶이 벼랑끝으로 내몰렸다. 이에, 참다 참다 못해 일어난 농민들의 항거가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라 안팍의 위기가 날로 높아가던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과 함께 마음속에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을 창도하였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 기치를 내세운 동학은 신분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근대적 인권울 주창(主唱)하여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나 조선정부는 이를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했다. 급기야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고,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이곳 보은에서 다시 꽃피었다.
보은 군수에게 고함
무릇 사람 노릇하기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첫 번째가 곧은 절개로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신하 노릇하기요, 두 번째가 죽는 날까지 온 마음 온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자식 노릇하기요, 세 번째가 정조를 지키며 사는 지어미 노릇하기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미여 유사(有事)하고 무사(無事)함 또한 운명이다. 무사하고 안락할 때 태어났거나 힘들고 어지러운 때에 태어났거나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쉽고도 어렵고, 어렵고도 쉽다.
오늘날 왜적(倭賊)과 양적(洋賊)이 나라 한가운데 들어와 혼란이 극심하다. 지금 서울은 온통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년(1592)과 병인년(1866)의 치욕이 되씹힌다. 그 때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삼천리 강산이 흉악무도한 짐싱들의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우리 수만 명은 죽기를 멩세하고 힘을 합쳐 저 왜적과 양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켜내고자 한다. 바라건대 보은 군수도 충의(忠義)로운 선비들을 모아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협력하여 함께 보국(輔國)하기를 간곡하게 바란다.
개사년(1893) 3월 10일 - 동학 창의유생 등, 백배상서
저마다 하늘님 되는 세상을 향하여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온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청산에서 기포령(起包令)이 내리던 날 집 떠나기를 망설이던 나에게 단호히 말씀하시던 아버님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나라가 무너지고서야 어찌 부모형제가 있겠느냐. 어서 채비하여 집을 나서라. 네 아우도 데려가라. 가서, 저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權貴)들을 물리쳐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다 두고 장차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되는 세상을 열거라." 손병희 통령 지휘 아래 논산으로 내려온 우리는 전봉준 장군 부대와 연합하여 공주로 진격했다. 노성을 지날 때 진눈깨비와 함께 목천의 동학농민군 일곱 명이 처참한 몰골로 연합부대를 찾아왔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선점하고자 가파른 산등성이에 군량미와 무기를 숨겨두었던 목천 세성산 근거지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고 한다. 이인과 웅치 효포전투를 시작으로 우리들은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놈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꿰뚫리고 가슴팍이 씻기고 팔뚝이 떨어져나간 동학농민군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씻겨진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가지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숱한 까마귀 까마귀 떼, 까마귀 떼를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갑오년(1894) 11월 무명 동학농민군
무너진 하늘,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
석 달 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금치에서 물러나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들은 11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도 다시 패배하여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연합부대를 해산했다. 터지고 찢겨져나간 살가죽에 솔잎을 짓찧어 붙인 채 태인에서 정읍으로, 입암으로, 순창 임실 장수 무주 황간 영동을 거쳐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용산 청산을 지나 보은에 돌아왔다. 돌아온 보은에는 관군들이 부숴버린 장안마을 폐허의 초막(草幕)들과 살갗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을 받고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날이 저물고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모닥불을 지피고 얼어붙은 몸을 서로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흰 어둠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12월 18일 꼭두새벽,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마다 까마귀에게 눈알 뺏기고 심장 파헤쳐진 채 나뒹굴던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아, 수많은 농민군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그대들을 따라 저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 신라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갑오년(1894) 12월 무명 동학농민군
올라왔던 길 빛의 계단.
다른길로 내려가는데 길 이름이 '하늘길'이다. 중간중간에 설명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돌성과 진달래 이야기
1894년 12월 보은북실전투
1893년 보은장안집회 당시 임명된 대접주명단
보은관아에 전달된 통고문
1893년 3월 보은 장안집회
보은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 16 북실마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찾았다.
東學亭(동학정)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점거당하였다. 경복궁 수비병은 무장해제되었고, 백성들은 다투어 도성 밖으로 피신하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 국왕은 궁궐 안에 유폐되기에 이르렀고, 조정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낼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커다란 혼란을 겪었다. 일본은 친일 개화파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갑오개혁의 추진과정에 간섭하면서 국정을 농단하였다. 나라 전체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발발
7월 25일 오전 7시 아산만 풍도 부근에서 일본 함대가 선전포고 없이 청의 군함에 함포사격을 가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성환전투, 9월 16일에는 평양전투가 벌어졌고, 9월 17일에는 압록강 어구에서 황해해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요동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과 더불어 대륙을 침략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서 국가의 독립을 보전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들
충청도, 경기도, 평안도는 청일전쟁의 무대로 변해 도서가 파괴도고 마을들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충청도 아산에 들이닥쳐서 곳곳에 방화하고 관청과 마을에 들어가 인명을 해치며 돈과 곡식을 빼앗아갔다. 또한 평양 주변의 마을들은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여 폐허로 변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외국군대가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참혹한 시기를 겪어야 했다.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를 계획
1894년 8월 2일 보은 사각면(현 탄부면) 고승리 냇가에는 동학도 수백명이 하늘을 뚫는 의기로 집결했다. 보은군수 정인량이 집결지를 찾아 오자 산골짜기 집회장소로 안내한 동학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관민이 함께 창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지 10일만에 보은에서 처음으로 의병봉기에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은 동학 두령인 임규호 황하일 이관영 김재현이 주도하였다. 동학의 대도소가 위치했던 보은은 이 해 가을 동학교단이 대규모 무장 봉기를 결정한 뒤 충청도.경기도.강원도.경상도의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모여드는 중심 무대로 떠오른다. 보은은 국가가 큰 위기에 처했을때 반일, 민족운동에 앞장선 의로운 지역이었다.
廣濟蒼生(광제창생)
용담기 - 용담유사

사십평생 이뿐인가
무가내라 할길없다
귀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하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조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정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항심 절로난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날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날라왔지
운명(殞命) - 전봉준 유시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時來天時皆同力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은 무슨 허물이랴
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愛國丹心誰有知
교훈가 - 용담유사

슬프다 이내신명
이리될줄 알았으면
윤산(潤産)은 고사하고
부모님께 받은세업(世業)
근력기중(勤力其中) 하였으면
악의악식(惡衣惡食) 면치마는
경륜(經綸)이나 있는듯이
효박한 이세상에
혼자앉아 탄식하고
그럭저럭 하다가서
탕패산업(蕩敗産業) 되었으니
원망도 쓸데없고
한탄도 쓸데없네
동학혁명군 추모가

보국안민 제폭구민 갑오동학혁명
우러러 보이고 머리 숙여지네

겨레의 새길을 열어준 그 혁명
혁명은 꺾여도 겨레는 살았네

외국군 때문에 좌절된 그 혁명
상처는 깊어도 동학은 자랐네

(후렴)
세상을 위해 목숨 바친 거룩한 님이여
우리들 앞날을 열어주소서
꼭 지켜야 할 동학의 덕목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마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실 것이다.
둘째, 하루 세 끼의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어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마라. 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마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데에나 토하지 마라. 만일 길이거든 반드시 묻어라. 그렇게 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보는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마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동학혁명군 12개조 폐정개혁안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주시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1.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영부(靈符)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주술적 의미로 많이 활용되었던 영부이다. 이러한 영부를 붙이면 총을 쏘아도 맞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고 해서 전투 경험이 없고 무기가 빈약했던 농민군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한 전술적인 차원에서 활용되었던 듯 하다.
종곡리에서 - 도종환

장렬하게 패배한 자의 생애는 아름답다
떨잎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단풍이 불꽃으로 온 몸을 태우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당당하게 쓰러진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굴욕의 나날을 살기보다
떳떳한 패배를 선택한 그들이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늘
그들의 영혼이 맑게 씻어놓은
푸른 하늘을 오늘 우리도 본다
나뭇잎이 썩어서 나무뿌리를 키우듯
그들의 영혼이 썩어서
우리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안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생은 아름답다
그들이 흘린 피를 우리는 역사라 한다
그들이 온몸으로 쓰고 간 역사 위에 우리가 서 있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이들의
한 생애는 아름답다
대나무 끝에 깃발처럼 목숨을 걸고
그들이 흔들었던 빛나는 패배의 정신
출렁이며 살아오는 불굴의 햇살은 아름답다
당당하게 패배한 자의 생애는 아름답다
동학성지 人乃天亭(인내천정)
보은취회의 역사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약 20여일간 보은 장내리에서 전국의 동학도 수만명이 모여 척양척외, 보국안민을 외치며 혁명성을 띤 오늘날의 촛불집회와 같은 최초의 민회였다.
올해는 1893보은취회 125주년이며 이를 기념하고자 합니다. 역사문화의 축제로 보은취회는 신명나게 춤추며 생명살림과 공정한 세상을 꿈꿉니다. 미투처럼 권력이 무기가 되는 세상을 넘어, 누구나 상식적인 생각의 장이 펼쳐지는 공평한 사회를 향해 걸어갑니다.
여성, 어린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향한 동학의 따뜻한 시선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무수한 개똥이들이 한 차원 진화할때 세상은 변화할 것입니다.
수운대신사 최제우
(1824~1864)

해월신사 최시형
(1827~1898)
보은장안마을 : 장안집회의 현장으로 광화문 복합상소때 상경한 동학도들은 외세들이 판치는 것을 보고 나라의 위기를 느끼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운동으로 바꾸었다. 1893년 3월(음) 10일부터 4월 2일까지 20여일간 예전의 외속리면 장내리 장안마을에서 척왜양창의 운동을 벌였다.
원한의 공주 우금티
동학군은 우금티에서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40여회나 공격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사진은 왼쪽에서 바라본 오늘의 우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