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 48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8세에 애석하게 세상뜨시니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 덕동골 간좌원에 안장하고 배 광주안씨를 祔右(부우)하였다. 공은 고 휘 允奭(윤석)과 비 덕수 이씨 사이의 4남 중 차남이니 형은 명선 제는 중선 정선이요. 슬하에 2남을 두시니 영소 영호이고 손은 윤수 종수 임수이다. 후손들의 예행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아 향당의 사표되니 이 모두 공의 후덕유지라 이에 공의 청덕지행을 기리고 가언선행을 천추에 전하고져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삼가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34년 2월 28일 립
안동후인 청원문화원장 ○산 김영교 짓고 불초손 윤수 삼가쓰다
단기 4334년 2월 28일 립
안동후인 청원문화원장 ○산 김영교 짓고 불초손 윤수 삼가쓰다
입구에 있는 묘소는 어경선 선생의 묘비를 세운 손자분의 묘소이었다.
어경선 선생의 묘소는 오천리 대동골로 알고 있었는데, 추모비문에는 뒷동골이고 가깝다고 해서 주민에게 물으니,
저 너머 푸른 소나무 아래에 있다고 알려주셨다.
저 너머 푸른 소나무 아래에 있다고 알려주셨다.
이곳의 GPS상의 묘소 주소는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 487이다. 애국지사 묘소만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愛國志士 魚敬善 先生(애국지사 어경선 선생)
여기는 평생을 참 선비로 살았고 나라가 위태로울때 父子(부자)가 倡義(창의)의 선봉에서 抗日義兵(항일의병)을 진두지휘하시며 이 나라를 지키려 혼신을 다하시다 서거하신 민족의 큰 스승께서 永眠(영면)하는 곳이다. (2005.8.15 건국포장 수상)
여기는 평생을 참 선비로 살았고 나라가 위태로울때 父子(부자)가 倡義(창의)의 선봉에서 抗日義兵(항일의병)을 진두지휘하시며 이 나라를 지키려 혼신을 다하시다 서거하신 민족의 큰 스승께서 永眠(영면)하는 곳이다. (2005.8.15 건국포장 수상)
咸從魚公 諱 敬善 之墓(함종어공 휘 경선 지묘)
咸從魚公 諱 敬善 之墓(함종어공 휘 경선 지묘)
공의 휘는 경선이요 자는 성중 호는 일암이고 함종후인이니 시 조 휘 화인공의 29세손이다. 화인공은 고려 명종시 중국 宋寧宗(송녕종) 전란을 피하여 고려에 귀화하여 평안북도 함종에 정착하고 관향을 함종으로 하였다. 歷至(역지) 11세 조 휘 變甲(변갑)은 중훈대부, 집현전 직제학, 겸 지제교, 세자 시독원, 좌문학을 지내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시었다. 12세 조 문효공 휘 孝瞻(효담)은 대사성, 이조판서, 숭록대부판중추부사, 봉조하에 제수되시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순충적덕보조공신, 함종부원군이요 13세 조 문정공 휘 世謙(세겸)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관상감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함종부원군이
되시고 기노소에 드시어 범장을 하사바드시었다. 26세 조 진사공 휘 명희는 공의 조부요 조 고 휘 기우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고 휘 允奭(윤석)은 중암 김평묵과 성재 류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의암 류인석 선생과 함께 창의하시었다. 시조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혁혁한 공훈으로 충효의절이 조야에 널리 찬송되었다. 공은 단기 4202년에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서 출생하니 천품이 의연강직하고 명민하여 일찌기 성재 유중교 선생과 의암 류인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서는 물론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시니 학문과 덕행이 一郷(일향)의 이망이었다. 한말에 국운이 기울어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때 을미사변으로 閔后(민후)가 시해되자 이에 격분하여 강호사림과 함께 제천 충주 원주 지방에서 창의하여 구국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류인석 선생과 같이 만주로 가서 항일운동에 투신 활약하였다. 류인석 선생이 순국하시매 크게 애통하고 귀국하여 국내 동지를 규합 군자금 조달 책임을 맡아 의병활동에 크게 공헌하시었다. 의병사서인 昭義新編(소의신편) 8권 척화거의사실대략 사류동의자 명단에 부자가 함께 수록되었으니 계계승승 애국충절의 聲譽(성예)가 향당에 떨치었다. 이제 여생을 후진양성에 힘쓰기로 결심하고 청주 용암동 이정골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덕면 시동리 옥천 월외 지방 등 여러 곳에 초빙되어 훈학하시고 말년에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에 정착하여 유망한 棟樑(동량)을 양성하는데 일심전력 한 몸 바치시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시어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저 항의하여 진충보국하시고 후학을 길러 육영의 덕행 남기시니 그 遺芳(유방)이 천추에 빛나리. 단기 4249년 7월 21일 향년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