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석, 어경선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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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 454-7
탐방로그
어윤석, 어경선 선생 추모비는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오천마을 마을회관 앞에 위치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어윤석 선생은 대전현충원에 계시고, 어경선 선생의 묘소는 오천리 대동골, 종제이신 어취선 선생은 청주 가덕면 화림사 뒤에 있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위치를 찾고 있었다.
애국지사 어윤석, 어경선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어윤석, 어경선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어윤석, 어경선 선생 추모비
아! 여기 오천리 마을은 멀리는 삼승산과 만수봉, 대왕산과 일봉산, 안으로는 태자봉과 매봉이 불쑥 솟아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데, 물줄기 넉넉한 보성천이 마을을 감싸고 휘돌아 금강으로 흘러가니 천혜의 은둔지요 길지라 하겠다. 이 곳에 일제에 의해 쓰러져 가는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의(義)로써 맞서 싸운 애국지사가 살았으니, 바로 심재(心齋) 어윤석(魚允奭). 일암(一菴) 어경선(魚敬善) 선생 부자(父子)이시다. 어윤석 선생은 본관이 함종으로 1846년 5월 6일 출생하여 1898년 2월 17일 서거하였다. 묘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위정척사에 투철하였던 선생은 함종어씨 세거지인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서 태어나 외세를 피하여 진천.목천 등으로 남하하여 강학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때는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만행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였다. 단발령이 선포되고 국모(國母)가 시해 당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세차게 일어났다. 선생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동문으로 존경하던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선생이 이끄는 호좌의진(湖左義陣)에 투신하여 일제에 위협받던 나라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하였다.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倡義)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擧事)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일을 차마 어찌 다 말로 하랴! 일을 도모하매 우리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고, 죽는다 해도 대의(大義)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어경선 선생은 심재 선생의 둘째 아들로 1869년 2월 5일 출생하여 1916년 7월 21일 서거하였다. 묘는 이 곳 오천리 뒷동골에 있다. 선생은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남하하여 오천리에서 살았다. 선생 역시 성재(省齋).의암(毅菴) 두 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학문의 경지가 깊고 정밀하여 유림에 명성이 높았다. 선생은 청주.가덕.옥천 등의 마을에서 강학을 하는 한편 을미의병 때(1895년) 호좌의진에서 아우 중선(中善)과 함께 부친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고초를 겪고 공을 세웠다. 의암 류인석 의병장이 중국으로 1차(1896년).2차(1898년) 망명을 할 때, 선생은 스승 류인석 의병장을 수행하여 동지들과 온갖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초를 함께하였다. 이 때 선생의 부친 심재 선생은 류인석 의병장이 2차 망명을 계획할 때 함께하자 약속하고 준비하던 중 갑자기 서거하였다. 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한 몸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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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자 온 힘을 다한 심재. 일암 선생! 선생 부자에 대한 공로는 사후 100여년이 지나 조국 광복 60년이 되던 2005년에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지금 이 추모비는 일암선생의 묘소가 있는 뒷동골과 거리가 가까우니 영령이 강림하시어 한없이 감읍하실 것이다. 우리 오천리 주민과 함종어씨 중앙종친회와 문정공파종회.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보은군문화원은 정성을 모아 두 분 선생을 추모하고, 나라 사랑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심재 선생의 증손 임수(壬秀) 씨가 할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글을 부탁하므로, 남평인 문희순은 옷깃을 여미고 이 글을 짓는다. 전면대자는 영월인 전찬덕이 썼다.
서기 2022년 11월 17일 제 83주년 순국선열의 날에 세우다.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 454-7 마을회관 앞
애국지사 어윤석, 어경선 추모비 제막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