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칠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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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 19-1
탐방로그
이승칠 의사 공적비의 비명이 의사에서 지사로 바뀌었다고 해서 지나는 길에 다시 찾았다.
앞선 3년 전 탐방시에는 李義士 承七公 抗倭義訣記念碑(이의사 승칠공 항왜의결 기념비)이었지만
李志士 承七公 抗倭義訣記念碑(이지사 승칠공 항왜의결 기념비) 바뀌었다. 비석 전체를 새롭게 건립한 것 같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은 충청도 보은 출생으로 고종 4년 서기 1867년에 무과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찰방.감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융희 4년 경술국치의 변을 당하자 곧 자결순국하려하여 아편을 삼키고 거의 절명의 지경에 이르렀는데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구하게 되었으며 한해를 건너 서기 1912년에 일본천황 메이지(明治)의 상을 당하자 일제가 우리나라에서도 국상의 의식을 거행하며 국민들에게 상복을 입게 하려고 현지 일본 경찰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요하자 승칠 공이 감연히 앞에 나서 우리 태황제 부자가 계신데 어찌 일본황제의 복을 입느냐 죽어도 입을 수 없으니 통감부에 고하여 빨리 나를 죽이게 하라고 대드니 일본경찰도 당황하여 다시 생각할 것을 권고하고 이튼날 다시 고문하였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수일간을 서로 힐난하였으며 가족들에게 청주에 용무가 있어 다녀온다고 하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봉황대 위로 올라가서 북향 사배하고 절벽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곳으로 의롭게 몸을 던져 순절하였으며 기후 가족들이 공의 문서를 정리하다 다음과 같은 유서를 발견하였다.
이승칠 의사 공적비의 비명이 의사에서 지사로 바뀌었다고 해서 지나는 길에 다시 찾았다.
이승칠지사 공적비
충북 보은 출생으로, 1910년 사헌부 감찰직에 재직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여 하였으나 뜻을 이루자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일본왕이 사망하자 일제는 한국인들도 상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함에 이를 거부하고 1912년 6월 26일 망국의 한을 품은채 "몸이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다. 이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될 수 없다(身被讐服萬代羞恥 寧爲殞首 不作夷狄)" 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 봉황대에서 투신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신성인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충정을 기리고 추앙하는 마음으로 가슴속 깊이 간직합시다.
李志士 承七公 抗倭義訣記念碑(이지사 승칠공 항왜의결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