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홍주의병 전투일지
1906년 3월 15일 정산 천장리(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의병 봉기, 홍주공격 시도,
3월 16일 공주 공격계획에 따라 화성 합천(현 청양군 화성면 합천)으로 이동,
3월 17일 일본헌병대와 홍주관군들의 공격으로 의병진 와해,
5월 9일 홍산군 지치동(련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 재봉기, 홍산 관아 점령.
5월 13일 서천 비인 경유하는 5일간의 전투 후 남포성 함락, 남포군 병사 31명 및 유회군 33명 의병 합류.
5월 19일 결성 유숙 후 홍주로 진격 홍주성 점령. 일본 헌병 덕산방면으로 도주.
5월 20일 홍주성 점령 후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이 합류, 의병진 재편.
5월 20일 공주주둔 일본 경찰, 헌병대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1일 일본 경찰대 경부, 보좌원 순검 13명 홍주성 공격, 대흥으로 패퇴.
5월 22일 서울 경무고문부의 일본인 경시, 순사 등 총 21명, 홍주성 공격위해 증파.
5월 24일 서울에서 증파된 21명과 공주 경무진위대 파견 조선병 57명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7일 홍주의병 일본경찰 일본인 3명, 일진회원 2명 체포(5월 29일 밤 처형).
홍주의병 진압 위해 공주진위대 20명, 청주진위대 위관 1명, 병정 50명 파견.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보병 2개중대 홍주파견 명령.
5월 29일 곽한일, 남규진 의병부대(약 400명) 홍주성 입성.
5월 30일 일본군 보병 2개 중대(약 400명) 기병 반대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 홍주성 포위.
5월 31일 오전 2시 30분경, 일본군 홍주성 공격, 3시경 일본 기마병 폭파반 동문 북문 폭파,
보병, 헌병대, 경찰대 성안 진입. 7시 반경 시가전 후 일본군에 의해 홍주성 전체 점령. 홍주의병 수백명 이상 전사.
8월 6일 유준근, 최상집, 이상구, 안항식, 남규진, 신보균, 이식, 문석환, 신현두(홍주 9의사) 대마도 유배.
1906년 3월 15일 정산 천장리(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의병 봉기, 홍주공격 시도,
3월 16일 공주 공격계획에 따라 화성 합천(현 청양군 화성면 합천)으로 이동,
3월 17일 일본헌병대와 홍주관군들의 공격으로 의병진 와해,
5월 9일 홍산군 지치동(련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 재봉기, 홍산 관아 점령.
5월 13일 서천 비인 경유하는 5일간의 전투 후 남포성 함락, 남포군 병사 31명 및 유회군 33명 의병 합류.
5월 19일 결성 유숙 후 홍주로 진격 홍주성 점령. 일본 헌병 덕산방면으로 도주.
5월 20일 홍주성 점령 후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이 합류, 의병진 재편.
5월 20일 공주주둔 일본 경찰, 헌병대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1일 일본 경찰대 경부, 보좌원 순검 13명 홍주성 공격, 대흥으로 패퇴.
5월 22일 서울 경무고문부의 일본인 경시, 순사 등 총 21명, 홍주성 공격위해 증파.
5월 24일 서울에서 증파된 21명과 공주 경무진위대 파견 조선병 57명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7일 홍주의병 일본경찰 일본인 3명, 일진회원 2명 체포(5월 29일 밤 처형).
홍주의병 진압 위해 공주진위대 20명, 청주진위대 위관 1명, 병정 50명 파견.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보병 2개중대 홍주파견 명령.
5월 29일 곽한일, 남규진 의병부대(약 400명) 홍주성 입성.
5월 30일 일본군 보병 2개 중대(약 400명) 기병 반대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 홍주성 포위.
5월 31일 오전 2시 30분경, 일본군 홍주성 공격, 3시경 일본 기마병 폭파반 동문 북문 폭파,
보병, 헌병대, 경찰대 성안 진입. 7시 반경 시가전 후 일본군에 의해 홍주성 전체 점령. 홍주의병 수백명 이상 전사.
8월 6일 유준근, 최상집, 이상구, 안항식, 남규진, 신보균, 이식, 문석환, 신현두(홍주 9의사) 대마도 유배.
홍주의병 이후 활동
1906년 5월 차상길 당진 소난지도에서 의병투쟁. 6월 이세영 체포.
1908년 유배 방면 후 애국계몽운동 전개. 7월 이용규 청양 추티에서 의병 재봉기.
10월 이용규 예산 현곡(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이남규 자택에서 민종식 등과 의병 재봉기 협의.(11월 20일, 예산 공격계획 수립)
11월 홍순대, 부여군 은산면 의병 80여명 규합하여 의병활동 전개.
11월 17일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이남규, 이충구, 일본헌병, 지방병, 일진회원의 습격으로 체포.
11월 20일 김복한, 홍주의병대장 민종식과 의병봉기 논의로 구속되었다. 11월말 방면.
11월 20일 민종식 체포, 공주부로 이송 뒤 서울로 압송.
1907년 1월 맹달섭, 부여군 일본인 가옥 습격, 일본인 3명 사살.
2월 21일 맹달섭, 경기도 죽산의 쌍령으로 이동 활동. 5월 7일 맹달섭, 당진주재소 습격.
7월 3일 민종식 교수형 선고, 7월 4일 종신유배형 선고
9월 이남규, 이충구 부자 일본기마대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 귀순거부로 온양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학살.
10월 김복한 보령군 순사보조원과 순검에게 구금.
12월 안병찬, 박창로, 정산(현 청양군 정산면)의 칠갑산 부근에서 항쟁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
이만식, 당진, 해미, 대흥, 서산, 부여, 공주, 경기 안성, 용인, 죽산, 양성에서 활동.
1908년 3월 11일 맹달섭, 청양군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 1909년 7월 김동락, 김무경 일본헌병대에 체포.
1911년 이세영, 만주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통의부 군사위원 겸 사령장 등 역임.
1915년 7월 김한종, 장두한, 신현두, 성달한, 윤병일, 성문영, 유창순, 한훈, 항일비밀단체인 대한광복회 설립 조도.
1919년 3월 김복한, 3.1운동 발발 계기로 안병찬, 김덕진, 전양진, 임한주 등과 함께 파리장서운동 전개.
홍주의병 편제
대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최)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목,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식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최졍순
선봉장 : 이남규, 박영두, 후군장 : 정해두 서기 : 문석환 군량관 :성재두, 박제순 향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참모 : 안병찬, 박창노,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2013년
건립 홍성군수 김석환
조각 목원대 교수 이창수
1906년 5월 차상길 당진 소난지도에서 의병투쟁. 6월 이세영 체포.
1908년 유배 방면 후 애국계몽운동 전개. 7월 이용규 청양 추티에서 의병 재봉기.
10월 이용규 예산 현곡(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이남규 자택에서 민종식 등과 의병 재봉기 협의.(11월 20일, 예산 공격계획 수립)
11월 홍순대, 부여군 은산면 의병 80여명 규합하여 의병활동 전개.
11월 17일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이남규, 이충구, 일본헌병, 지방병, 일진회원의 습격으로 체포.
11월 20일 김복한, 홍주의병대장 민종식과 의병봉기 논의로 구속되었다. 11월말 방면.
11월 20일 민종식 체포, 공주부로 이송 뒤 서울로 압송.
1907년 1월 맹달섭, 부여군 일본인 가옥 습격, 일본인 3명 사살.
2월 21일 맹달섭, 경기도 죽산의 쌍령으로 이동 활동. 5월 7일 맹달섭, 당진주재소 습격.
7월 3일 민종식 교수형 선고, 7월 4일 종신유배형 선고
9월 이남규, 이충구 부자 일본기마대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 귀순거부로 온양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학살.
10월 김복한 보령군 순사보조원과 순검에게 구금.
12월 안병찬, 박창로, 정산(현 청양군 정산면)의 칠갑산 부근에서 항쟁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
이만식, 당진, 해미, 대흥, 서산, 부여, 공주, 경기 안성, 용인, 죽산, 양성에서 활동.
1908년 3월 11일 맹달섭, 청양군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 1909년 7월 김동락, 김무경 일본헌병대에 체포.
1911년 이세영, 만주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통의부 군사위원 겸 사령장 등 역임.
1915년 7월 김한종, 장두한, 신현두, 성달한, 윤병일, 성문영, 유창순, 한훈, 항일비밀단체인 대한광복회 설립 조도.
1919년 3월 김복한, 3.1운동 발발 계기로 안병찬, 김덕진, 전양진, 임한주 등과 함께 파리장서운동 전개.
홍주의병 편제
대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최)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목,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식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최졍순
선봉장 : 이남규, 박영두, 후군장 : 정해두 서기 : 문석환 군량관 :성재두, 박제순 향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참모 : 안병찬, 박창노,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2013년
건립 홍성군수 김석환
조각 목원대 교수 이창수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1 홍성의총 뒷편에 있는 홍주의병기념탑을 찾아왔다.
홍주의병기념탑 준공비
내포의 중심지이자 충절의 고장인 홍성(홍주)에서 거병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홯신 홍주의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우국충정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되살려 후손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홍주의병기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탑은 삼재(하늘, 땅, 사람)를 의미하는 가본도구 위에 홍주성과 월계천, 홍성천을 형상화 한 기단/거병년도(1895년, 1906년)을 담은 두 개의 탑신/홍주의병을 상징하는 인물상과 부조/홍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구와 문주/홍주의병사를 기록한 기념비 등을 조형화하여,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념탑 건립을 계기로 홍주의병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항시 추모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자세로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고향을 굽어보는 배산임수의 평화로운 이 땅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2013.02.28
내포의 중심지이자 충절의 고장인 홍성(홍주)에서 거병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홯신 홍주의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우국충정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되살려 후손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홍주의병기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탑은 삼재(하늘, 땅, 사람)를 의미하는 가본도구 위에 홍주성과 월계천, 홍성천을 형상화 한 기단/거병년도(1895년, 1906년)을 담은 두 개의 탑신/홍주의병을 상징하는 인물상과 부조/홍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구와 문주/홍주의병사를 기록한 기념비 등을 조형화하여,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념탑 건립을 계기로 홍주의병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항시 추모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자세로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고향을 굽어보는 배산임수의 평화로운 이 땅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2013.02.28
홍주의병사(洪州義兵史) - 홍주의병 개요
홍주의병 김복한을 중심으로 1895년에 봉기한 제1차 홍주의병은 척왜분위기를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케 하였으며,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에 거병한 제2차 홍주의병은 일본군과의 홍주성전투에서 수백명이 산화하여 단일전투로는 의병항쟁 사상 최대 규모의 희생자를 내는 등 홍성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과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제2차 홍주의병 수백여명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구백의총)은 의병항쟁 유적지로는 보기 드물게 지난 2001년 8월 국가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홍주의병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홍주의병항쟁이 부각되지 못하고 급격한 도시발전과 세월의 흐름에 가려져 잊혀져가고 있어 홍주의병항쟁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도록 홍주의사총 부지 내에 홍주의병기념관을 건립하여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홍성군민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 홍성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후세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홍주의병 김복한을 중심으로 1895년에 봉기한 제1차 홍주의병은 척왜분위기를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케 하였으며,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에 거병한 제2차 홍주의병은 일본군과의 홍주성전투에서 수백명이 산화하여 단일전투로는 의병항쟁 사상 최대 규모의 희생자를 내는 등 홍성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과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제2차 홍주의병 수백여명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구백의총)은 의병항쟁 유적지로는 보기 드물게 지난 2001년 8월 국가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홍주의병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홍주의병항쟁이 부각되지 못하고 급격한 도시발전과 세월의 흐름에 가려져 잊혀져가고 있어 홍주의병항쟁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도록 홍주의사총 부지 내에 홍주의병기념관을 건립하여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홍성군민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 홍성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후세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