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3.1운동기념비(장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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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도산리 492-5
탐방로그
기미3.1운동기념비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도산리 492-5의 3.1운동기념광장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 10년이라는 긴세월동안 옥고를 치루었고 소위 벌금이란 명목으로 많은 재산을 빼았겼다. 아아 이 어지 적반하장이 아닐 수 있으랴. 이 분하고 원통함을 누구에게 호소하며 무엇으로 달래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 우리가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의 광명을 되찾아 자유를 누릴수있다는것은 오로지 님들의 조국에 바친 피의 대가요 희생의 결정체임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다행히도 이 고장 향토사학가 김갑현씨와 삼일운동사 연구위원 김용상씨의 6년유여에 걸친 집념어린 노력으로 오랫동안 망각의 단충에 묻혀있던 호국충절의 사적이 발굴 고증되어 마침내 빛을 보게되었다. 이제 그날의 우국충정어린 항일의거를 영구불변의 역사로 보존하고 그 보국희생정신을 소중히 간직하고자 여기에 돌을 다듬어 세웠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 도산리 492-5에 있는 3.1운동기념광장 내, 기미3.1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인터넷 상의 자료에서는 '산492-5'라고 하지만, 그냥 '492-5'이다.
장곡3.1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선포식 시위에 참가했던 윤익중이 독립선언문 100여 매를 가슴에 품고 귀향하여 30여 명의 동지들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주민들에게 항일운동에 참여할 것을 선도하고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4월 7일 화계리 근처 앞산 "매봉재"에 인근 부락의 주민 15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였다. 하오 8시경에 이르러 면민 5백여 명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한상철의 일제 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문 취지 낭독이 있은 후, 강산을 진동하는 독립만세 함성으로 이어졌으며, 김동하 등을 주동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국권침탈에 대한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장곡을 기점으로 울려 퍼졌다. 본 기념비는 그 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후세에 기리고자 1994년 장곡3.1운동 기념비 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하였다.
己未
三一運動紀念碑
(기미삼일운동기념비)
己未
三一運動紀念碑
(기미삼일운동기념비)
창의기. 이곳 유서깊은 오서산 산자락에 한시대를 의롭게 살다가신 수많은 의사들의 피어린 투쟁의 역사가 있다.
때는 기미년 춘삼월! 만물이 소생하는 활기찬 계절이었지만 이땅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뼈에 사무치는 통한과 분노에 쌓여있었다. 당시 중앙고보에 재학중인 이 고장출신 윤익중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는 독립선언문 선포식과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독립선언문 100여매를 가슴에 품고 귀향하여 윤태병 김상호 김동성 최석한 서갑용 한상철 등 30여 명의 동지들에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있는 항일운동의 실상을 설명하였다. 동지들은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한 핏줄을 타고난 조선민족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이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신명을 바칠것을 결의하였다.

10여일간의 은밀한 회합을 거친 끝에 면내 각동리마다 조직책을 선발하여 인원동원 물자와 자금조달등 임무를 분담하여 조직적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배부하고 일시에 대대적인 항일시위를 결행할것을 획책하였다. 동년 4월 1일밤 면내 전역의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려 거사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하고 4월 4일 야음을 틈타 화계 광성 신풍리에서 규합한 주민 100여 명이 매봉산에 집결하여 오수남 동지의 타종을 신호로 봉화를 올리고 농악을 울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터져라고 외쳤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연일 계속되는 격렬한 항일 시위는 면내 전역에 가속도로 확산되어 마침내 4월 7일 에는 도산리 뒷산에 각부락책임자 인솔하에 300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였으며 이자리에서 한상철의 일제만행규탄연설과 독립선언문취지설명이 있은후 일제히 북을 울리면서 만세를 외쳤다. 노도처럼 흥분된 시위행렬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자유를 울부짓는 함성은 지축을 흔들었다.

이들은 여세를 타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 직원들도 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불응하고 도주함으로 이에 격분한 시위군 중은 면사무소에 난입하여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고 항일운동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일제는 무장 군경을 장곡면 일대에 집중 배치하고 무차별한 총격과 잔인 무도한 사태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시위 행렬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알몸으로 저항하다가 드디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200여 명의 인사들이 일경의 쇠사슬에 묶이어 홍성으로 압송되었으며 그 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져서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지는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