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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893-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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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893-1 금강공원 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를 찾아왔다.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던 터에 삼척김씨 종친 등이 주축이 되어 김상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한 『충절사』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殉國 金尙台 義兵將 忠節碑(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
김상태 의병장의 휘는 상호, 자는 경육, 호는 백우이다. 본관은 삼청으로 실직군와 위홍의 27세손으로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나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뚜렷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을미사변때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그 다음해인 1896년 영월에서 의암 유인식에 의해 결성된 호좌의병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에서 유인석선생으로부터 춘추대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송, 임강, 백두산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정미칠조약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한 채 이강년과 함께 정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호좌창의군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영월 덕포 전투, 영춘 서벽 전투, 문경 갈평 전투, 영주 죽령 전투 등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08년 이강년의병장이 제천 작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자 그 뒤를 이어 호좌대장군이 되어 의병들을 지휘하였다.
장군은 호좌의병을 이끌고 태백, 소백산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왜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격고문을 발표했으며, 영월, 영춘, 순흥, 문경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의 신고로 1911년 경북 순흥군 석천포에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당당했으며 또한 죽음을 예사로이 여겨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한 지 13일만에 순절하니 춘추 50세였다. 장군의 시신은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부인은 경주 손씨로 혼인 후 은거 생활을 계속하여 파란 많은 세월을 보내다 1924년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 서림산에 안치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삼척 김씨 종친회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김당태 의병장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종친의 뜻을 모아 비를 건립하다.
서기 1998년 3월 1일
그 후 만주에서 유인석선생으로부터 춘추대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송, 임강, 백두산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정미칠조약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한 채 이강년과 함께 정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호좌창의군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영월 덕포 전투, 영춘 서벽 전투, 문경 갈평 전투, 영주 죽령 전투 등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08년 이강년의병장이 제천 작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자 그 뒤를 이어 호좌대장군이 되어 의병들을 지휘하였다.
장군은 호좌의병을 이끌고 태백, 소백산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왜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격고문을 발표했으며, 영월, 영춘, 순흥, 문경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의 신고로 1911년 경북 순흥군 석천포에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당당했으며 또한 죽음을 예사로이 여겨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한 지 13일만에 순절하니 춘추 50세였다. 장군의 시신은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부인은 경주 손씨로 혼인 후 은거 생활을 계속하여 파란 많은 세월을 보내다 1924년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 서림산에 안치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삼척 김씨 종친회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김당태 의병장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종친의 뜻을 모아 비를 건립하다.
서기 1998년 3월 1일
이 순국 백우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는 1995년 3월 1일 영월종친회 의결사업으로 삼척김씨 대종회의 후원과 영월 종친들의 성금으로 1997년 12월 30일 착공하여 1998년 3월 15일 완공하게 된 것이다.
충절비 건립 추진회
회장 김형진 고문 김진태 총무 김종호 임원 김인영 김형길 김복운 김형재 김홍영 부회장 김현영 고문 김형재 감사 김재선 김무성 김광호 김진만 김윤수 김좌현 김상호 부회장 김원태 고문 김태형 감사 김석하 김우영 김형조 김두영 김국영 김상영
충절비 건립 추진회
회장 김형진 고문 김진태 총무 김종호 임원 김인영 김형길 김복운 김형재 김홍영 부회장 김현영 고문 김형재 감사 김재선 김무성 김광호 김진만 김윤수 김좌현 김상호 부회장 김원태 고문 김태형 감사 김석하 김우영 김형조 김두영 김국영 김상영
뜻을 모아주신 분들
김규용 김보영 김교영 김원효 김창로 김영배 김필영 김원목 김영근 김도기 김몽영 김형복 김상영 김원석 김윤백 김원태 김차영 김형수 김보영 김익수 김희동 김인하 김운하 김봉호 김설호 김돈수 김무영 김태영 김동식 김진갑 김영수 김형복 김성식 김흥극 김형오 김용기 김귀영 김형덕 김형록 김봉길 김동식 김형대 김재화 김형달 김영택 김형도 김춘영 김형달 김진만 김진익 김태수 김동순 김주용 김형옥 김형창 김태연 김관영 김진연 김육만 김진연 김종규 김형극 김상용 김범영 김구영 김원갑 김형목 김인수 김진옥 김형태 김원홍 김수현 김진현 김해성 김원철 김형익 김문수 김해수 김광수 김두영 김기선 김봉학 김원필 김진호 김원술 김형주 김명철 김수영 김만식 김형석 김진호 김진해 김동영 김중식 김원명 김만석
외지종친 김진방 김형준 김용태 김주영 김진태 김진오 김진현 김진선 김진승 김진옥
김형일 주구파종중회
김규용 김보영 김교영 김원효 김창로 김영배 김필영 김원목 김영근 김도기 김몽영 김형복 김상영 김원석 김윤백 김원태 김차영 김형수 김보영 김익수 김희동 김인하 김운하 김봉호 김설호 김돈수 김무영 김태영 김동식 김진갑 김영수 김형복 김성식 김흥극 김형오 김용기 김귀영 김형덕 김형록 김봉길 김동식 김형대 김재화 김형달 김영택 김형도 김춘영 김형달 김진만 김진익 김태수 김동순 김주용 김형옥 김형창 김태연 김관영 김진연 김육만 김진연 김종규 김형극 김상용 김범영 김구영 김원갑 김형목 김인수 김진옥 김형태 김원홍 김수현 김진현 김해성 김원철 김형익 김문수 김해수 김광수 김두영 김기선 김봉학 김원필 김진호 김원술 김형주 김명철 김수영 김만식 김형석 김진호 김진해 김동영 김중식 김원명 김만석
외지종친 김진방 김형준 김용태 김주영 김진태 김진오 김진현 김진선 김진승 김진옥
김형일 주구파종중회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893-1 금강공원 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를 찾아왔다.
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
관리번호 17-1-1 / 소재지 : 영월읍 영흥리 / 건립자 : 삼척김씨 종친회 / 관리자 : 영월군
김상태(1862~1911) 의병장은 삼척 김씨로 1862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李康年)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유인석(柳麟錫) 대장의 휘하에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도에 걸쳐 일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일군과 싸웠다.
일본관헌은 혈안이 되어 장군의 검거에 노력했으나 신출귀몰하여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니 향년 50세였다.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를 삼척김씨 종친회가 주축이 되어 1998년 3월 15일에 이곳 금강공원에 세워졌다.
관리번호 17-1-1 / 소재지 : 영월읍 영흥리 / 건립자 : 삼척김씨 종친회 / 관리자 : 영월군
김상태(1862~1911) 의병장은 삼척 김씨로 1862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이강년(李康年) 의병장과 손잡고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유인석(柳麟錫) 대장의 휘하에 합세하여 경상, 충청, 강원 3개도에 걸쳐 일군 수백명을 무찔러 의병사상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이강년, 민긍호 두 장군이 1908년대에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자 이후 3년간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일군과 싸웠다.
일본관헌은 혈안이 되어 장군의 검거에 노력했으나 신출귀몰하여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니 향년 50세였다.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를 삼척김씨 종친회가 주축이 되어 1998년 3월 15일에 이곳 금강공원에 세워졌다.
殉國 金尙台 義兵將 忠節碑(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