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63-2
- 탐방로그
- 이설 선생의 묘 부근에 선생의 집인 하허당 터가 있어 함께 탐방하기 좋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선열 이설 묘
선열께서는 홍성인으로써 그 벼슬이 우부승지에 이르렀으나 1895년 왜구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강개하여 애국지사 김복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홍주목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체포구금되시다. 그후 특사를 받었으나 1905년 올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다시 오적의 처형을 상소하고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후 1906년 음력 윤4월 29일 순절시 한수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시다.
1963년 3월 1일 국민장 추서
1963년 3월 1일 국민장 추서
선생의 집인 하허당 바로 부근에 선생의 묘가 있다. GPS상의 주소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63-2 이다.
순국선열 이공 설 지묘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위하시던 공은 건국공로는 마침내 이 땅에 광복을 가져오시다. 왜적이 우리를 유린할 때 같은 하늘아래에서 숨 쉴 수는 없다 하시며 상에 소문을 올리시되 신이 살아서는 용렬하여 비록 의기를 들고서도 적을 토멸하지 못했사오나 죽어서는 반드시 원수를 갚을것이니 하늘에 계신 호국영령들도 그때는 족히 음우하여 주실줄 믿는다고 하시었다. 참으로 대의에 순하는 높은 기개와 지조가 서리는 필절이시다.
공의 휘는 설이요 자는 순명, 호는 복암이시며 관은 연안이시니 이조 명문 충정공 연평부원군 휘 귀공의 9세손이신 휘 조익공의 독자로 1849년 경술정월 24일 홍성군 구항면
공의 휘는 설이요 자는 순명, 호는 복암이시며 관은 연안이시니 이조 명문 충정공 연평부원군 휘 귀공의 9세손이신 휘 조익공의 독자로 1849년 경술정월 24일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샛갓에서 태어나시다. 유시에 백부 휘 조겸공에게 입양하시고 1889년 갈성문과 병과에 급제 부수선에 등용되어 수선교리정언을 거쳐 특평으로써 동서학교수와 전시대독관을 겸하다가 1874년 응교사복시정을 지나 익년 동 부승지 우부승지에 오르셨으나 동년에 명성황후 민씨시영사건을 당하자 홍주로 귀향하여 관하 17군역 거의격문을 발하고 김복한을 총사로 군진을 가추었으나 목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왜경에 피집되시었다. 그 동안 토왜상소와 격문으로써 왜침의 부당성을 수차천명하시니 황실에서는 특사후 오리려 안주 군수를 제수하시었으나 궂이 사양하시니 이는 다시금 의용지재를 만나 구국의 대지를 펴고 저하심이라. 1905년 을사변란을 당하시매 매국오적의 처단을 상소하고 김복한과 동도 상경하여 국권회복 제략을 단모하시다가 재집투옥되시다.여시한 수난이 어찍 일량차이었더냐 회차마다 신애하시고 필경 사경에 이르시매 1906년 병오 윤 4월 29일문두의 유소와 순절시를 남기고 자진순국하시다. 이토록 공께서는 나라의 정간이시라, 그 백절불굴하신 충절과 지기는 밤하늘의 성좌처럼 우리 민족의 빛이요 자랑이로다. 솔과 가람이여 그 프르름을 님과 함께 온 누리에 빛내어라. 나라에서는 이미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시었으며 후에는 증손 인배가 있고, 인배생자에 종억, 종찬이 있다.
殉節詩(순절시)
善竹橋頭血(선죽교두혈)
선죽교에서 흘린 포은선생의 피를
人悲我不悲(인비아불비)
사람들은 슬퍼하나 나는 슬프지 않아
孤臣亡國後(고신망국후)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한후
不死更何爲(불사갱하위)
죽지않고 어찌하리오.
善竹橋頭血(선죽교두혈)
선죽교에서 흘린 포은선생의 피를
人悲我不悲(인비아불비)
사람들은 슬퍼하나 나는 슬프지 않아
孤臣亡國後(고신망국후)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한후
不死更何爲(불사갱하위)
죽지않고 어찌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