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 582-6
- 탐방로그
- 애국지사 이종헌의 묘가 산중에 있어 찾기 어렵다면 누동2리 회관을 찾아가면 좋다. 묘와 256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4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충남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 582-6이다.
애국지사 인제 이선생 종헌 지묘
애국지사 인제 이선생 묘비문
하나님이 이 나라를 왜침에서 구출키 위해 구국지사를 1890년 4월 9일 서산군 안면읍 승언리에서 또 한 분 낳게 하시니 곧 휘 종헌 호 인제이시다. 고의 휘는 규삼이요 비는 밀양박씨이며 성은 이씨요 관은 광주이니 고려 충신 석탄공 휘 존오의 후이다. 지사는 원래 충효애국사상이 출중하여 동족과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나라를 위해 받는 능욕을 왜구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마음이 투철하여 한말 승지 김공 휘 병년이 설립한 광영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의 얼을 되살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왜침에서 구출키 위해 구국지사를 1890년 4월 9일 서산군 안면읍 승언리에서 또 한 분 낳게 하시니 곧 휘 종헌 호 인제이시다. 고의 휘는 규삼이요 비는 밀양박씨이며 성은 이씨요 관은 광주이니 고려 충신 석탄공 휘 존오의 후이다. 지사는 원래 충효애국사상이 출중하여 동족과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나라를 위해 받는 능욕을 왜구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마음이 투철하여 한말 승지 김공 휘 병년이 설립한 광영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의 얼을 되살려
국난을 회복하기 위해 전념하고 외침을 물리치는 길은 민족의 단결에 있음을 통감하여 대한독립결사단을 조직하고 안면읍에 3.1만세를 주도했으며 또 서산지단을 결성하여 그 단장으로서 단원모집과 군자금 확보에 진력했다. 지사는 그 중에도 교육 제1주의로 왜침의 악독과 망국의 억울함에 혈분하여 민족혼이 살아있으면 나라가 다시 산다는 겄을 작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킨 겄이 일경에 알려져 체포되고 그 후 서산 독립단연락원이 양대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한독립단사건이 이러났다. 지사는 일경의 모진 고문에도 불굴했으며 복심법원 공판에 검사의 원심 승복 권유에 쇠고량찬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검사는 왜 피고의 항소권을 막는가 대한독립을 위해 바칠 내 생명이 하나밖에 없는겄을 나는 그대의 인권침해가 심히 불쾌하다고 말해 정내를 숙연케 했다. 검사는 피고의 법정을 모독하는 언행으로 보아 능히 협박 후갈은 물론 독립운동을 했음이 분명하다고 징역 9년을 구형했다. 지사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조국광복의 초지는 더욱 가열되었으며 그 결정으로 8.15의 광복을 보게 되었다. 지사는 그 후에도 교육진흥에 진력하다가 1957년 6월 18일 67세로 서거하시니 장우 누동리 갑좌원하고 배는 경주김씨이니 생이요 선공 41년 무오에 졸하야 묘재 공묘우하고 유 1남1녀하니 남은 호우요 여적 여양 진승균하고 후배는 밀양박씨니 신축생이요 유 1남2녀하니 남은 원우요 여적 밀양 박성복 평강 채창석하고 손 유6하니 상열 해양상재호림은 홍우생이요 시민성민은 원우생이다. 내외 손증을 부진기라. 자고이래로 충국애족의 그 위대한 혼은 영원불멸의 천정이 있다. 그러므로 1977년 12월 23
일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대한독립유공자에 대한 추서훈이 내리니 이는 곧 지사의 애국단성을 민족의 사표로써 알림이요 또한 우리 향토와 자녀의 영광이다. 1982년 7월 13일 안면반도청년회에서 승언리에 추모비를 세워 불초천학이 그 서문을 썼던 바 이제 다시 정부의 특별배려로 지사의 묘역을 단장하매 묘비를 세워 공적을 쓰게 하니 거듭되는 영광이다. 지사의 애국한 얼이 이 땅의 영원한 통일을 도인하는데 명촉이 되기를 빌며 이상으로 망졸서차이라.
서기 1984년 8월 15일 남평후인 문원모 근찬 풍양후인 조광연 근서
서기 1984년 8월 15일 남평후인 문원모 근찬 풍양후인 조광연 근서
충남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에 있는 이종헌 선생의 묘를 찾아가는 길에 남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 1581-3에서 묘 안내판을 발견했다.
이종헌 지사의 묘소는 누동리이고 안내판이 위치한 곳은 고남리였다. 안내판과 거리가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