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산3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에 오르시어 해평윤씨를 조선조 대문벌의 반열에 올려놓으신 현조로서 오음공파(梧陰公派)의 지파조(支派祖)이시다. 13세조 휘 훤(暄) 공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셨고 백사(白沙)가 호이시어 이하 후손은 충간공-오음공계-백사공파로 불리우고 있다. 오음 휘 두수공의 10대 손인 공은 1856년 9월 20일 고(考) 휘 치혁(致赫)공과 비(妣) 창녕조씨(昌寧曺氏) 슬하의 3남중 2남으로 태어나셨으나 형 휘 규선(圭善)공이 백부께 양자 가심으로 장자가 되셨다. 평소 온화하셨으나 불의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성품이었고 이웃의 어려움에는 베풀기에 망설임이 없었으며 사필귀정의 명제를 한 시도 잊지 않는 분이었다고 연로하신 어른들의 증언과 칭송으로 전해오고 있다. 국권을 상실한 비탄지절에 공의 우국지심은 기미 1919년 청양군 화성면 모듬내-합천-현, 화성장터-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으로 분출되셨으니 마을청년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나누어주며 5일 간격의 장날마다 수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 또한 오서산 주변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오서산 능선에서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다가 그해 4월 5일 일본군 헌병들에게 체포투옥되시어 온갖 고문과 고초를 겪으시니 공의 나이 55세이셨고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27년 1월 4일 졸하시니 향년 63세이셨다. 구
전으로만 남아있던 공의 이러한 공적은 청양군 3.1운동 유족회장 안선영님 외 많은 분들의 노고로 2006년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어 명문화 되고 공식 공적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국가보훈처의 묘소 성역화 작업 지원금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삼가 이 비를 세우니 「충효와 돈목은 공의 유훈이라!」 공의 애국심은 길이 천양(闡楊)됨이 마땅할 따름이다. 2010년 3월 20일 건국대 석좌교수 정치학박사 신복룡 삼가 짓고 후손들이 삼가 세우다.
윤철선 선생의 묘를 향하는 길이다. 산중에 있어서 오르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사진 속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독립유공자 윤철선 묘소 산정리 300m
그럼에도 길을 찾기 어려워 위성지도를 이용하여 찾은 묘를 찾는 것이 좋다.
獨立義士 海平尹公 諱 喆善 之墓(독립의사 해평윤공 휘 철선 지묘)
공의 휘는 철선(喆善)이요, 자는 중길(重吉)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고려조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판공부사를 지내신 휘 군정(君正)공이 시조다. 3세 조 휘 석(碩) 공은 우정승이셨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 되셨으니, 그 후손들이 해평(海平)을 본고나으로 삼고 있다. 4세조 휘 지표(之彪)공의 시 호는 충간공(忠簡公)으로 우리 충간공파의 파조이고 중대 광문 하평리를 지내셨으며 12세조 휘 두수(斗壽)공은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지내시고 영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