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7투사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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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청소리 331-4
탐방로그
항일7투사기적비는 청남삼거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길을 찾기 어렵다면 신전 버스정류장 또는 청남우체국을 찾아오면 된다. 우체국과는 174m 떨어져 있어 도보로 3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抗日 七鬪士 紀績碑(항일 7투사 기적비)
아 여기에 고귀한 피의 사실이 있다. 근안컨대 외적일본이 아국 주권과 강토를 강탈하자 이에 격분한 국내지사들이 잃은 조국을 회복하고저 독립운동의 깃발을 내걸었다. 오호통재라 이곳 청남면에 군수사 조병채, 임종구며 의병장 오준상과 의병십장 윤기중과 기미3.1운동투사 윤병환, 이동명, 이영은등 7지사가 배출하여 진충성인하고 서사항쟁한 보람에 감격의 태극기는 우리 가슴깊이 광명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고 광복의 환희앞에 역사적 충의청남을 피로써 빛내였으니 조국애에 부라는 선열들의 열화같은 투지와 철벽같은 기백에 다시 한번 감격하는 이 마당에 겨레들이 정성을 모아 돌을 다듬어 그 충절을 기리니 선열제공의 애국단성은 천추에 빛나도다.

선열제공 약사
조병채는 한양인이니, 고종 을유생으로 왕진리에 거주터니 시적경술국치라 분연개탄하고 1910년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지나 길림에 주둔중인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장군의 군자금조달사가 되여 하삼도에서 헌금모집하여서 군비조달과 군기매입으로 활약터니 국운이 애의한지라 1915년 왜적에 체포되여 함흥형무소에서 8년간 옥고를 겪고 출옥후 불굴의 독립투쟁으로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하였음으로 대한민국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길이 공의 우국충절을 기리다.
임종구는 풍천인이니 고종 정해에 왕진에서 출생하여 경술국치후에 군수사 조병채와 더부러 군자모금에 헌신하였으며 군정부연락과 자금조달을 전담 하였던바 만주를 4일에 행진하고 초소를 무난통과하여 시인에 이위축지최면술이라 하더라. 오호라 시불리방 여신책도 무용이요 왜정의 폭정에 의거 4년만인 1915년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각골하였으니 대한민국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여 길이 신책과 충혼을 기리다.

오준상은 동복인이니 고종 무인생이며 왕진리에 거주하다. 일찌기 사제에서 훈련중 전참판 민종식의 삼고로 역사적항일운동에 몸담아 선구적 활동으로 인하여 망명중인 상해 김구선생으로부터 격려문을 입수하고 의병 50명일대를 편성하여 몸소 의병장이 되여 적시적소에서 일병을 기습하고 노획한 무기로 무장을 포강하여 1906년에 탑산전투에 대거출전하여 사기왕성에 많은 전과를 올린바있으나 세불리로 체포되니 적은 경성으로 압송하여 사형판결한지라 고종은 이를 신속배려하여 특명석방하다.

윤기중은 파평인이니 고종 무인에 적곡관현에서 출생하였다. 공이 29세 병오에 을미조약체결에 불승비분하여 의병장 민종식막하에 십장으로 종군하니 국내는 물론 만주, 장춘, 봉천과 로국해참위까지 유격하여 왜적 섬멸하는 전공을 올렸고 그후에 한성에서 미국관광단을 영접하려는 일총독을 폭살하려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즉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간 미결수로 불굴투쟁타가 겨우 석방되니 장구한 의병생활에 신후무육하여 외손 이계업이가 생전에 숙수지공을 성실히 하였으며 사후에 송종화례하거 함포왈유시공유시외손이다.
윤병환은 칠원인이요 이동명과 이영은은 제주인이라. 이 3지사는 고종 기축동경이며 지곡리 태생이다.
이 3지사는 망국의 울념 속에서 기미 3월1일 독립만세의 거족적인 의거에 절호의 기회임을 감지하고 이동명을 선두로 지곡당산에서 3월 3일에 시위를 벌려 민족의 원한을 봉화와 만세함성으로 왜적의 학정을규탄하자포악한 왜헌의 마수에 체포되어 잔인한 태형에도 불굴의 정신은 적을 감복시켰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기미년 6월 끝내 공주형무소에 송치되여 윤병환, 이동명은 6개월간 복역하고 이영은은 병보석되였으나 계속적인 탄압은 일익거기하니라.
청양군 청남면 청소리 331-4 항일7투사기적비를 찾았다.
抗日 七鬪士 紀績碑(항일 7투사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