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중산리 469
- 탐방로그
- 길을 찾기 어렵다면 중산리태평마을회관을 찾아오면 된다. 비석과 296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4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애국열사 윤병구선생 기적비 ]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윤병구(尹炳球) 선생은 청남면 중산리 태평마을에서 출생하여 경술국치 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22년경 총독 및 일제 고관의 처단과 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유석현(劉錫鉉)·김지섭(金祉燮) 등과 협의했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 23일 상오 9시 30분경 동지 김지섭·유석현과 함께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를 방문하여 군자금 5만 원을 요구하였다가 2천 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그 후 동월 25일 약속된 자금을 수령하러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으나 백(白)의 신고로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다. 선생께서는 소위 시국표방강도(時局標榜强盜) 죄목으로 중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청양군에서는 선생의 공적과 그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영구히 기리기 위해 1991년 10월 이 기적비를 세웠다.
윤병구(尹炳球) 선생은 청남면 중산리 태평마을에서 출생하여 경술국치 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22년경 총독 및 일제 고관의 처단과 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유석현(劉錫鉉)·김지섭(金祉燮) 등과 협의했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 23일 상오 9시 30분경 동지 김지섭·유석현과 함께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를 방문하여 군자금 5만 원을 요구하였다가 2천 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그 후 동월 25일 약속된 자금을 수령하러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으나 백(白)의 신고로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다. 선생께서는 소위 시국표방강도(時局標榜强盜) 죄목으로 중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청양군에서는 선생의 공적과 그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영구히 기리기 위해 1991년 10월 이 기적비를 세웠다.
애국열사 윤공병구 기적비
애국열사 칠원윤공 병구 기적비문
공의 휘는 병구이시며 자는 의병이요 성은 윤씨니 본관은 칠원이시다. 신라 태종무열왕때 태자대사로서 고명원로에 오른 시조 휘 시영의 37세손이며 고려문하시중 충요공 휘 한의 19세손으로 고 휘 림학과 계비 전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서기 1893년 3월 16일 청양군 청남면 중산리 469번지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유년시절부터 성품이 담대하시고 모험심이 강하시어 경향각지를 빈번히 왕래하시면서 신문물탐구에 몸소 실천하셨고 정의의 기백을 연마하셨다. 서기 1905년 일제의 총검아래 을사보호조약이 늑결되어 국권이 박탈되자 비분강개하여 구구운동의 의지를 굳히신 공은 서기 1919
공의 휘는 병구이시며 자는 의병이요 성은 윤씨니 본관은 칠원이시다. 신라 태종무열왕때 태자대사로서 고명원로에 오른 시조 휘 시영의 37세손이며 고려문하시중 충요공 휘 한의 19세손으로 고 휘 림학과 계비 전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서기 1893년 3월 16일 청양군 청남면 중산리 469번지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유년시절부터 성품이 담대하시고 모험심이 강하시어 경향각지를 빈번히 왕래하시면서 신문물탐구에 몸소 실천하셨고 정의의 기백을 연마하셨다. 서기 1905년 일제의 총검아래 을사보호조약이 늑결되어 국권이 박탈되자 비분강개하여 구구운동의 의지를 굳히신 공은 서기 1919
년 3월 1일 국권회복을 위한 울분에 젖은 배달민족의 만세함성이 전국방방곡곡에 울려퍼림에 의연히 구국일념으로 비장한 각오를 다지시고 만주로 건너가서 북경에 본거를 둔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셨다. 조국광복에 골몰하시던 공은 서기 1922년에 유석현 김지섭과 함께 제등총독을 암살할것과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및 조선은행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신뒤 군자금마련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동년 12월 23일에 서울무교동에 거주하는 부호이며 조선총독부판사인 백윤화를 찾아가 거사 내용을 알리고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하자 재산상속을 받이않아도 거금을 조달할수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공일행은 그의 부친 백운영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그 역시 순순히 응하지 아니하여 권총을 꺼내들고 2천원을 꼭 조달토록 명령하고 돌아와 백윤화에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거던 돈을 마련한뒤 단매문 구내게시판에다 '다음열차로 떠난다는 암호를 쓰라'는 편지를 보내고 동월 25일밤 공과 유석현이 군자금을 인수차 백윤화의 잡에 찾아가셨다가 사전에 잠복한 본조경찰서왜경에게 피체되어 시국표방강도죄로 중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르시다가 서기 1931년 2월 9일에 옥중순국하셨다. 이렇듯 공의 애국충절과 살신성인하신 강인한 항일투쟁의 발자취는바로 조국광복의 근저가 되었으며 거룩한 애국정신은 정의구현의 대도로서 온백성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의 성충대의를 추앙하여 서기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서울동작동국립묘지 충렬대에 안장하였으니 그 기상은 영원불멸하리라. 공의 거룩하신 충의와 애국정신을 기리빛내기 위하여 이에 청양군민의 이름으로 이곳 공의 향리에 기적비를 세우니 이 애국단성 천추에 빛나리라.
충남 청양군 청남면 중산리 469에 윤병구 선생의 기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