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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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139-4
탐방로그
민종식 선생의 유허비에서 선생의 고택까지는 235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는 4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들이 대거 향응하여 자못 지세충천한 의군으로 홍주성을 총공격하니 왜병들은 예산방면으로 도주하고 동년 5월 19일에 홍주성을 점령하니 군세가 대진하였다. 일제는 홍주성을 탈환하기위하여 익일부터 10일간 수회에 걸쳐 공주경무고문지부의 경찰대, 수원헌병분대의 헌병대, 서울경무고문부와 공주진위대의 경찰대, 서울헌병대의 헌병등이 막강한 화력으로 내습하였으나 충천한 창의군의 사기에 눌려 패퇴하고야 말았다. 일군은 패전만을 거듭하자 통감 이등박문은 주답군사령관에게 출병명령을 내리매 일군사령관 장곡천은 재경성 남부군 수비대 사령관 동조 소장에게 필요한 병력을 홍주로 파견하라고 훈령하여 보병 2개중대로 일개 지대를 편성하고 기관총 2문에다 전주수비대 보병 1개소대를 합세시켜 동월 30일에 총공격을 감행해오니 실로 일제가 조선에 주둔한 전병력을 총동원한 셈이었다. 이에 맞선 공의 창의군은 주야를 가리자 아니하고 역습하여 왜경 부지휘관 사방이하 30명을 사살하는 등 격전을 거듭하였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동월 31일에 홍주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은 재기를 도모하기위하여 청양 축치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수습하고 예산군 대지면 한곡리 전참판 이남규택에서 은거하면서 익덕일, 박창로, 곽한일, 이세선, 윤병일, 윤필구, 조의주 등이 경남, 전남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전북 무주군 적장산성곽을 근거로 일대 의거를 도모하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기초하다가 1906년11월에 공주탑산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큰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공은 동지 김덕진외 10여명과 함께 송주지부를 거쳐 1907년 7월 2일에 평리원으로 압송되었으니 재판결과 총대장 민종식에게는 사형을 중군장 황영수, 정재호, 참모장 곽한일, 참모 이용규, 김덕진, 향관 박윤식에게는 각각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당시 법무대신 이하영의 진청으로 내각회의에서 공에게 한등급 감형결의하여 진상하니 동월 4일에 재가를 받아 공 이하 모두가 유배되었다. 공은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2월 3일에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혹형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1917년 6월 26일에 57세를 일기로 서하니 공의 한은 지하에 서렸다. 조국이 광복되자 국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 빛내기위하여 1963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고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에 있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오호라 공이 창의한 홍
홍주의병이야 말로 구한말 의병항쟁기에 있어 최익현선생이 창의한 순창의병과 함께 양대의진으로 꼽히는 민족사에 길이 남을 쾌거가 아니라 그 큰 기세 이곳 칠갑산 푸른정기가 서려있는 정산면 천장리는 공이 어려서 뜻을 기른곳이자 홍주의병의 발상지이기에 공의 거국한 보국충절을 높이 추앙하고 후세에 기리 빛내고자 시임 심대평 충청남도 지사의 배려와 군민들의 성원으로 여기에 유허비를 세우노라.
충남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148에 있는 민종식 선생 유허비를 찾아가는 길에 안내판을 발견했다.
의병대장 민공종식 유허비
여흥인 민공의 휘는 종식이요 자는 윤조며 호는 퇴초자이니 서기 1861년 경기도 여주군 주내면에서 판서 민공영상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유년부터 영민한 재질과 강인한 의자를 지녀 장차 대성할 자품을 보이더니 20세 약관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6년에 국모 민비시해의 참변을 당하자 스스로 고간직을 버리고 향리인 충청도 정산에 은거하니 조야에 그 덕망을 칭송함이 높았다. 갑오이후 정국이 날로 그릇됨을 항시 비문강개하더니 무오년간에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의 높은 뜻을 품고 있던 중 을사오조약이 늑결되자 다시 상경하여 지기인 김복한, 김상덕, 이설등과 같이 해약상소를 봉정타가 일흉 이등박문에게 빼았겼다. 비분한 공은 즉시 정산 향제로 내려와 항일투쟁에는 의병활동이 최선임을 자각하고 1906년 3얼 동지를 규합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하는등 의거를 준비한후 청양, 보령등지에서 모집한 250명의 의병으로 동년 5월 11일에 홍산지치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남포, 보령, 함천군을 차례로 습격함으로써 많은 군기와 인마, 금품을 노획하고 의혈민중에게 창의에 동참할것을 호소하니 남포군수, 보령군수등 지방관과 수천의 용사가 운집하고 이세영, 정재호, 곽한일, 유준근, 이용규, 채광묵, 박윤식, 김덕진, 화영수 등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