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태 묘

4

주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비암리 산119-1
탐방로그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산59 송전탑(No 105) 주변에 애국지사 안종태 선생의 묘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해당 정보에 의하면 묘소는 송전탑(No. 105) 근방임을 알 수 있다. 위성지도를 참고하며 송전탑(No. 105) 위치를 찾았지만, 사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근방의 많은 묘소들도 확인하였지만 다른 성씨들의 묘소뿐이었다. 뒤늦게 다른 송전탑을 찾아갔다는 것을 깨닫고 재탐방을 진행했다. 양주시 광적면 비암리 산119-1가 안종태 선생의 묘소로 추정하면서 여정에 떠났다.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0-1에 차를 세우고 올라오다보면 편한 길을 찾을 수 있다. 안종태 선생은 가평 양주군 연곡리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안종규 선생과 형제 사이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0-1에 차를 세우고 올라왔는데, 오다보니 올라오는 편한 길이 있었다.
愛國志士 廣州安公 鍾台 之墓(애국지사 광주안공 종태 지묘)
애국지사 우로(又老) 안공 묘비문

근안 무릇 왕도의 성쇠와 인걸의 현회가 고금을 통해 이소고연히 순환하는 것처럼 전세하여 왔으나 확고한 충효정신과 애국애민의 충절이 정착되었더라면 찬역의 불미와 외침의 치욕도 입지 안는 유구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오직 공은 청백리 후예로 탄생하시어 휘는 종태요 자는 원옥 호는 우로이다. 본관은 광주로 광주안씨는 고려 대장군 휘 방걸부군이 조조요. 중시조 휘는 성부군으로 자는 습지 또는 일삼 호는 설천 또는 천곡이다. 벼슬은 평양백을 거쳐 강원도 군관찰사 의정부 좌참찬 등 주요관직을 두루 거쳐 증 좌찬성에 오르셨다. 이조 청백사 수편에 기록되었고 시호는 사간으로 공의 17대조가 되신다. 파조 휘는 철산부군이오. 벼슬은 사첨서령으로 증 이조참의를 제수받으시니 공의 16대조가 되신다. 황고의 휘는 홍원부군이요 자는 한규 호는 노하이시다. 황비는 달성서씨 진순의 따님이시다. 공은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속칭 계네미 마을에서 서기 1883
년 고종 계미 8월 12일 출생하셨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용모와 기상이 호락하고 단아하였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좋아하였고 행실은 효우에 바탕을 두었으며 재조는 세상의 쓰임에 합당하였더라. 성장하여가매 원대한 포부를 안고 상경하여 측량학을 공부하고 경기도 측량기사 지별감사로 근무하시던 중 치욕적인 제2차 한일조약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국을 등지고 중국으로 미주로 또는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분노와 설움을 폭발시켜 마침내 3.1운동의 거족적 봉기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학살 체포 구금되었다. 이 만행을 세게에 알리고저 육당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의암 손병희를 주로 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명월관에 집합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만해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 만세를 부른 후 경찰에 통고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한편 수만 군중과 학생들 약 5천 여 명은 탑동공원에 모여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공원을 나와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한문 남대문을 지나 왜성기까지 시위행진하였다. 공도 이에 합세하였더라. 그리고 고향인 양주로 나려가서도 이장으로 있는 아우 종규와 주동이 되어 동지인 조필선 김대현 이사범 들과 동년 3월 27일 밤 많은 동민들이 운집한 자리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선언하고 열렬히 만세를 부르고 시위하였다. 다음날 3월 28일 다시 백석면 오산리 대들벌에 모여든 면민 6백여명과 만세를 부르며 백석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하였다. 이때에 공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당시의 경기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1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 병세가 악화되여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으시다. 서기 1920년 7월 14일 운명하셨으니 향년 37세였더라. 노부모를 뫼신 시하의 몸으로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기 심경 어떠하셨으리오. 지금까지 공의 의적이 가리워져오다 서기 1990년 8월 15일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장지는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전진바위 선영 하 양좌원이다. 비는 파평윤씨로 춘영의 따님이시다. 서기 1881년 7월 23일 출생 서기 19
03년 5월 3일 졸하였다. 후비는 청주한씨 홍리의 따님으로 서기 1884년 2월 16일 출생 서기 1957년 1월 14일 졸하시니 묘는 3위 합폄이다. 1남 1녀를 두시니 사자는 익수로 선세의 유지를 받들어 일정시 항일운동으로 일관하였다. 비는 전주이씨 헌만의 따님이시다. 사손으로 병하 병은 병연이고 증손은 성환 태환이다. 여는 임주조씨 원영에게 출가 3형제를 두니 진세 진후 진남이다. 오호라. 공께서 순국하신지도 어언 70여 성상이 지났다. 일제는 무러가고 국권은 회복되니 살기좋은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 공의 의적을 후대에 전하여 영원코자 함이 그 도리임에 수비 기적하여 영세불멸토록 함이니라.
묘비 건립에는 효손 3형제의 합심협력과 문중 여러분의 현영과 정부보조금을 합하야 건립하였기에 기록에 남기고자 한다.

서기 1993년 계유 윤3월 일 3종손 병호 관수 근찬
愛國志士 廣州安公 諱 鍾台 之墓(애국지사 광주안공 휘 종태 지묘)
配 儒人 海平尹氏, 配 儒人 淸州韓氏 祔(배 유인 해평윤씨, 청주한씨 부)
양주시 광적면 비암리 산119-1를 안종태 선생의 묘소로 추정하고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