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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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신덕리 57-1
탐방로그
박윤식 선생 유허비는 와촌리 마을회관에서 약 500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8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박윤식 선생 유허비
애국지사 동암 박윤식 선생 사적비문

청절이 송백같고 지기강석 같으시니 국운이 기우르매 영달을 뿌리치고 거의하였도다. 공의 휘는 윤식이요. 호는 동암이요 관은 무안박씨이니 시조 후 25세손으로써 서기 1868년 무진 1월 20일 고 휘 한국공의 차자로 청양군 정안면 신덕리에서 나시어 숙 한풍공을 승계하시였다. 유시부터 한학을 면수하시고 오래 제가에 전념하시더니 30대에 이르러 동암의 관직은 궁내부 직속 전기과8품이었다. 관직을 배수출사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을 당하매 비분사퇴하고 같은 퇴관동지 정재호 김덕진 등과 함께 결의형제하여 보호조
약을 배척하고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1906년 3월 하순 의병을 지휘하여 홍산으로부터 초발행군하니 홍산에서 제1회 작전하고 비인에서 제2회 작전하고 남포에서 제3회 작전하고 광주에서 제4회 작전을 거쳐서 홍주성에 돌입한 뒤 시기를 기다리던 차 익년 음 4월 18일 전 참판 문종식을 대장으로 홍산에서 기병하시니 이래 남포 보령을 거쳐 홍주성을 공략하며 공은 시종 ?관이 되어 의군의 전력을 드높였으나 미구에 간세의 밀통으로 적의 대군이 4위로 협습함으로 일대혈전 끝에 익월 7일 부득이 기성하였다.이때에 흘린 피가 성벽을 물드렸으니 시산은 곧 오늘날의 구백의총이라 분격한 의군 수령들은 신례원에 집결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친일 일진회의 끈질긴 침란으로 반위피집되어 평리원 심판으로 종신 유배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지로 1년만에서 해금귀가하니 그 후로는 왜경들의 현혹이 연일 부절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정면반대함으로 일경에 연행되어 방광과 수족이 불인함을 무릅쓰고 파옥도주하시고 미래 부여 공주 등지로 은신타가 때로 동지 연락이 필요할때면 폐인을 가장 왕래하며 끝까지 조국광복에 헌신하시더니 1939년 을묘 1월 29일 전북 군산시 미원 정한사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서거하시다. 나라에서는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하였으며 유자로 희보 희성이었고 희보 자는 재석 재은이고 재석 생남에는 만진 자는 순필 순철이다. 배 안인 인천이씨는 1869년 을사에 출생하사 갑인 4월 14일에 졸하시니 부군지묘에 합폄하시다.
묘는 정산면 신덕리 동산만세봉에서 2007년 4월 5일에 이장하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74묘역에 안장하시다. 본 비문은 전 묘비문으로 근찬하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신덕리 57-1 도로변에 박윤식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